즉시전력감 vs 흰 도화지

속지나 맙시다

by 이일일

[스타트업 사람 살림살이]




(* 정상적으로 많은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일하고 계신 시니어분들과는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경험과 실력이 바탕에 있음에도 하고 싶어 하지 않으시거나 고연봉 월급루팡을 꿈꾸시는 시니어분들.

지금까지 이야기 듣고 실제로 겪었던 부분들을 바탕으로 적었습니다.

혹시나 보시는 중에 멀쩡히 잘 일하고 계신 시니어분들은 또 기분이 나쁘실 수 있기에.. )


예전에 아주 짧게 시니어에 관련된 언급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시니어를 채용한다는 의미는 많은 부분을 기대하게 하고 그만큼 비용도 많이 들어갑니다.

다양한 경험과 절대적으로 많은 경험, 그동안 쏟아왔던 시간과 노력을 이제는 노련하게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회사에서 쏟아부어주기를 기대하며 우리는 그렇게.


'즉시전력감'인 누군가를 채용합니다.


음.. 아니 '채용함'을 당합니다.




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면접 때 이야기만 나누어보면 어쩜 그렇게 나의 속마음을 잘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 회사의 문제점들을 척척박사처럼 짚어내고

해결책도 쭉쭉 이야기해 주십니다. 마음의 응어리가 모두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유레카"


드디어 찾았습니다. 내가 찾던 진정한 시니어, 우리의 해결사

이제 우리 회사도 경험 많고 이력 좋은 시니어를 보유한 제대로 된 회사로 거듭나는 겁니다.

의심을 그렇게 많이 하던 저 조차도 기대가 더 크기 마련이고 심지어는 의심을 잊게 됩니다.


정말 신기한 경우들이 있으니까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가벼운 해결책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하면 돼요. 다 겪어봤어요. 저도"라고 이야기하며 짓는 미소에

넘어가지 않을 문제 투성이 회사의 인사 담당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때부터 스스로 가둬놓은 철창 속에서 내가 나 스스로에게 먹인 가스라이팅은 시작이 됩니다. 본격적으로.


또 하필 그런 이야기할 때는 그 당시의 공기와 호흡마저도 꽤나 멋지게 느껴집니다. 치명적 이게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누군가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도 매력적일 수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어렵게 느껴지는 곳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늘 벌어지는 일인 양 심적으로도 넘어갈 수 있게

일단 어떤 이야기를 가볍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당장 뿌리칠 수 없는 위안이 됩니다.


꽤 높은 연봉도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러니까 높은 연봉받지 싶기도 합니다.

이후 연봉협상은 없이 스톡옵션으로 받아도 괜찮다고 먼저 이야기해 줍니다.

어디서 이런 사람이 숨어있다가 나타났나 싶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때는 정말 그랬습니다.


그랬'었'습니다.




생각보다 그때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은 빠르게 밝혀지고 후회는 크게 남습니다.

특히 이런 과정을 여러 번 거치게 되면 내가 정말 사람을 볼 줄 모르는구나 싶은 생각도 더 강해집니다.

더 나아가서는 아 역시 사람 속은 절대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한 번의 시니어 채용에 실패하고 나서는 다시는 속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합니다.

그 이후에는 더 좋은 스펙의, 더 좋은 이력을 가진 시니어를 만나게 됩니다. 소개든, 지원이든.

그럼 또다시 속게 됩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다음 시니어를 채용하고 나가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면 이제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역시, 내가 인재를 활용할 줄을 모르나..?"


옆에서는 한 술 더 뜹니다.


"더 친해졌어야지"
"그렇게 하면 당연히 이해를 못 하지, 원래 스타트업 다니던 사람이 아닌데"
"너 같으면 이해하겠냐? 기분 안 나쁘겠어?"


아주 다양한 비판의 소리들이 귀에 날아와 꽂힙니다.


아, 역시 내 탓이구나


채용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는 돈만 낭비했다는 생각에 죄책감 마저 듭니다.

계속 도전해서 시니어분들과의 친밀감도 쌓고 내가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가짐도 크게 먹습니다.


나에게는 이런 고통이 따르는 동안 조직 전체에도 이상한 기운이 물들어 갑니다.

분명 경험이 많고 능력도 출중한 시니어가 왔다면 문제가 척척 해결되어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더 악화가 되거나 여전히 주니어인 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상황이 변하지를 않습니다.


무언가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은 전형적으로 모르는 단어나 이해 안 되는 워딩 투성이의 모호한 피드백.
디테일한 설명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것마저 없이 돌아오는 링크한 줄.
상황이 급박함에도 느긋한 이런 노력, 저런 노력을 해보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들.
내가 도와줄 것은 아니지만 아마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간 보는 식의 조언인 듯 조언 아닌 이야기.
언제라도 내게 부리나케 달려와줄 것처럼 끝맺음 인사는 "궁금하신 것은 언제든 물어보세요."로 끝.
조금만 업무의 영역이 벗어나는 것 같으면 시작되는 멋쩍은 웃음 "허허 그건 제 권한 밖이라서.."
차라리 모른다고 해주시면 좋은데 어김없이 나오는 라테, "어, 저 때는 이렇게 하면 됐었는데.. 허허"
잘 해결되었을 때 - "그거 보세요, 제가 그렇게 하시면 된다고 말씀드렸죠~~"
해결 안 됐을 때 -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그렇게 하면 문제 생긴다고 그때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일하다 보면 들려오는 곡소리 "매니저분들이 저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허허"


죽을 맛입니다. 정말


다 적지는 못했지만 하루에도 수십 가지 크고 작은 일이 터지는 스타트업에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쌓여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특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사람으로부터 어떠한 해결책도 마련되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 그 마음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죄스럽습니다.


중간에서 '가교' 역할을 하는 사람은 더 고역입니다. '내가 중간에서 잘못해서 그런 건가'

이런 조율, 저런 협의 같은 것들을 내가 만들어냈어야 하는데 못 만들어서 그런 것인가.

별별 각종 내가 나에게 던지는 화살들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시니어분들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주니어분들의 마음의 상처는 더 깊습니다.

사수가 있지도 않은 스타트업에 들어와서 내가 그린 기획이 맞는지, 틀린 것인지 확신도 잘 서지 않고,

고객과 분쟁이 있을 때는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인지, 어려움이 있는 건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아, 제발 나보다 미리 정답을 겪어본 사람이 옆에서 내가 가시밭길 걷기 전에 알려주면 좋으련만.

꿈에나 그리던 시니어분들이 들어왔을 때 기대하는 것은 단숨에 꿈조차 깨져버립니다.


속는 것도 한두 번이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이 되고 판단이 되는 순간이 잦으면

스타트업 전사들은 빠르게 마음가짐을 전환합니다.


아, 내가 해야 하는구나




글의 앞단에도 말씀드렸지만 절대 모든 시니어분들이 그런 것은 절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주변에 이런 시니어분들이 상당히 많이 계신 것도 사실입니다.

말 못 할 사정들을 겪고 있는 분들, 공감이 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결국 도화지를 택했던 것 같습니다. 단지, 먼저 택했을 뿐입니다.

즉시전력감의 시니어분들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저의 부족을 인정하고 말이죠.

회사에 시니어분들이 들어오셨을 때 적절한 즉시전력감으로 활약해 주실 수 있는 시기가 있지 싶었습니다.

아직은 그런 시기가 오지 않았다고 인정하고 도화지에 그림을 빨리 예쁘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흰 도화지의 주니어분들이 들어오셔서 그림을 하나씩 채워가는 것은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렇기에 인내도 많이 필요하지만 당연히 비용도 꽤나 들어가게 되는 투자인 것이지요.

누군가 키워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도 비용이라면 정말 많이 들어가게 됩니다.


또한,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결과가 나오리라는 보장도 사실은 없습니다.

가르치고 키우는 순간만큼은 자식을 키운다는 생각과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 것도 쉽지 않지요.

그러나 이런 주니어분들은 반드시 필요하고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교육과 훈련을 버텨낸 주니어분들은 반드시 시니어가 됩니다. 떠날 수도 있지만요.


저는 채용하면서 항상 이야기했었습니다.


"최고가 되어 떠나시면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 회사에서 주니어에서부터 성장을 해온 사람은 일단 회사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문화가 없더라도 없는 대로 이해하고 있고 조직에 대한 이해, 사람에 대한 이해 등 뛰어납니다.

그로 인해서 자정작용이 이루어지는 부분도 많이 있고 이는 많은 비용을 세이브해 줍니다.


그만큼 회사에 남으실 수 있도록 회사에서도 많은 변화를 약속하고 비전을 제시해야겠지요.

그렇지 못하면 성장한 동료가 우리 회사를 떠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입니다.

회사가 노력하고 변해야 함께 일하는 동료 직원들도 변하고 변한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1년 차, 2년 차, 3년 차, 4년 차 등 순차적으로 연차가 쌓이면서 동료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 회사에 남아주는 것은 그냥 우리 회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대단한 시니어 한 명을 채용하는 것보다 꽤 실리 있는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습니다.


이쯤 되면 완성된 시니어도 당연히 필요하게 되는 영역이 있고 그들이 가진 경험을 필요로 하는 순간들이 당연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회사에 적응하고, 특히 스타트업이라면 일하는 방식이나 문화에 대해서도 꽤 충격을 받으면서 접근하고 적응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기도 하구요.


그런 측면에서 정말 10년 이상 스타트업을 유지하고 있지 않는 이상,

혹은 이제 막 스타트업을 벗어났지만,ㅠ유연하고도 변화에 빠른 조직을 운영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면,

우리의 흰 도화지를 어떤 색으로 어떤 형태로 채워볼지 고민하는 것

조금 더 많은 시간을 써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즉시전력감이라는 꿈과 같은 기대를 품에 안고 채용을 하고, 천문학적인 연봉을 투자하고 상처를 받기보다

그 비용을 잘 성장하고 있는 우리 기존 멤버들에게 더 투자하고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회사의 환경과 여러 가지 요소들을 마련해 주는 것이 어쩌면 지금 시기에 더 적합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뻔하지만 늘 논쟁이 붙는 부분이죠.


키울 것이냐, 뽑을 것이냐


어차피 나중에는 둘 다 해야 합니다.

저는 처음에는 키우기로 했고 성장시키는 것이 나중에 누군가를 채용하는 데에도,

채용한 그분들이 회사에 적응하는 데에도 정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배웠습니다.


도화지에 그림이 예쁘게 그려지는 것도 꽤 볼만합니다.

보신 적 없으신 분들은 한 번 도전해 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여러분의 '동료 모으기'를 언제나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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