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누군가가 내민 투명한 우산

다 같이 산다는 것

by 봉봉


예전 현장 학습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도착과 동시에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버스에서 짐을 내려 끌차에 싣는 사이 빗줄기가 굵어졌다. 한 손으로는 끌차를 잡고 다른 한 손은 머리 위를 가린 채 서두르는데, 뒤에서 "저기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뭘 떨어뜨렸나 싶어 돌아보니, 처음 보는 여성분이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와 함께 서 있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경계부터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사심 없는 얼굴로 손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이거 쓰세요."


​그녀의 손끝에는 투명한 우산이 들려 있었다. 당황해서 멍하니 있자 그녀는 "비 맞지 말고 얼른 쓰세요"라며 우산을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뻗었다.

바로 앞이라 괜찮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녀가 건넨 호의는 이미 비옷이 되어 내리는 비를 포근하게 막아주고 있었다.


부탁이라는 이름의 부채


​사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부탁을 하는 것도,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내겐 너무 어려운 숙제였다. 스스로 해결하는 게 가장 속 편했다.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호의를 '갚아야 할 빚'처럼 느끼는 불편함 때문이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예전 어린이집 실습지를 찾을 때였다. 함께 공부하던 친한 언니 이모님이 원장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고민 끝에 실습을 부탁했다. 언니는 흔쾌히 수락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고마움은 독이 되어 돌아왔다. 그날 이후 언니의 태도가 달라졌다. 사소한 심부름부터 시작해 급기야 본인의 과제를 대신해달라는 선 넘는 요구를 해왔다. 거절하자 "우리 이모 원에서 실습 못 하게 될 수도 있어"라는 협박조의 말이 돌아왔다. 원장도 아닌 이가 휘두르는 어처구니없는 유세였다. 그 길로 실습을 포기하고 관계를 끊었다. 스스로 발품을 팔아 다른 곳에서 실습을 마쳤다.


​역시 부탁은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빌미로 더 큰 것을 요구하고, 들어주면 호구가 되고 거절하면 죄인이 되는 기분. 그럴 바엔 혼자가 낫다고, 나는 마음의 빗장을 더 단단히 걸어 잠갔다.


백화점 같은 삶, 다이소 같은 나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나 혼자 산다'는 불가능한 미션이 되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백화점' 규모인데, 내가 커버할 수 있는 역량은 '다이소' 정도였다. 그 거대한 갭을 메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손길이 필요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삶은 늘 예측 불허의 변수로 가득했고, 그걸 혼자 다 쳐내려 했다면 아마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


​아이가 입원했을 때, 나는 본드라도 붙여놓은 듯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 친정 부모님께 도움을 청했다. 대안이 없었기에 내뱉은 고육지책이었다. 과정 중에 짜증 섞인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어쨌든 덕분에 일을 지킬 수 있었다. 아이가 열성 경련으로 응급실에 갈 때, 떨고 있는 나를 대신해 운전대를 잡아주러 달려온 지인의 온기도 잊을 수 없다.


​혼자서도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나는 알음알음 수많은 도움을 먹고 자라고 있었다. 주고받는 메시지 속의 배려, 신랑과 아이들의 무조건적인 응원. 우리는 모두 남의 덕을 보며 살아간다는 누군가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다 같이 산다


​지인은 나를 보고 "부탁하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호구처럼 보이지 않으려, 빚지고 살지 않으려 나는 단단한 갑옷을 입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무리한 부탁은 웃으며 거절할 수 있는 여유가 내게 생겼음을, 그리고 절실할 때는 기꺼이 손을 내밀 줄 아는 용기가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나 혼자 산다'의 폐쇄적인 막을 내리고, '다 같이 산다'의 문을 열어보려 한다. 기분 좋게 남의 덕도 좀 보고, 내 덕도 기꺼이 나눠주면서. 비 오는 날 불쑥 건네받은 그 투명한 우산처럼, 나 또한 누군가에게 젖지 않는 마음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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