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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Jan 09. 2022

가사가 부린 마법에 흠뻑 취했던 그 때 나의 이야기

왈츠처럼 사뿐히 앉아 눈을 뗄 수 없어

'멜로디는 노래의 얼굴이고 가사는 노래의 성격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최근 한 영상에서 본 문장인데, 멜로디는 노래의 첫인상을 결정하고 가사는 노래의 분위기, 매력과 같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나는 노래의 가사를 읽는 걸 좋아한다.

멜로디 없이 가사를 오롯이 평서문으로 읽다 보면

그 가사가 혼잣말 같기도, 대화 같기도, 편지 같기도 하다.

‘멜로디’라는 얼굴에 가려져 있던 노래의 ‘성격’을 살펴보는 건 나에게 꽤 재밌는 일이다.


음, 아이유의 '밤 편지'를 예로 들어 보자.


우선, 멜로디를 중심으로(멜로디를 생각하며)

가사를 읽어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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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파도가 머물던

모래 위에 적힌 글씨처럼

그대가 멀리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늘 그리워 그리워

여기 내 마음속에

모든 말을 다 꺼내어 줄 순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

로 읽을 수 있다.

이때는 노래의 흐름, 가수의 호흡에 따라 가사가 나뉜다.



그럼, 가사를 중심으로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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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파도가 머물던 모래 위에 적힌 글씨처럼 그대가 멀리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늘 그리워.

여기 내 마음속에 모든 말을 다 꺼내어 줄 순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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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책을 읽듯이 가사에 초점을 맞춰서 읽어보면

내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노래일지라도 그 노래의 색다른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가사는 멜로디와도 잘 어울리고, 입으로 부르기도 쉬운 글이지만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글이다.


———


그렇다면 언제부터 내가 가사를 살펴보는 것을 좋아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 중학교 2학년,

엑소의 '나비소녀'라는 곡을 처음 들었던 때였던 것 같다.


나는 학창 시절에 케이팝을 참 좋아했다.

오후 6시만 되면 TV 앞에 앉아 엠 카운트다운, 뮤직뱅크, 쇼 음악중심, 인기가요와 같은 음악 프로를 굉장히 즐겨 보았고, 열정적으로 덕질(!)까지 한 케이팝의 열렬한 팬이었다.


나의 학창 시절을 함께했던 가수들 중에서도 '엑소'라는 가수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가수다. 그들의 팬이었든 아니든 그들의 노래로 우리의 학창 시절은 꽉 차있다.


엄청난 대히트를 친 곡 '으르렁'을 타이틀로 하는 엑소의 정규 1집 앨범에 '나비소녀'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다.

우연히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순간 나는 직감했다.


'아, 이 노래는 무조건 내 인생 곡이 될 거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를 이야기해보자면, 일단 노래의 얼굴인 멜로디가 너무 좋았다.


그 전 아이돌들이 대부분 완전히 파워풀하거나 혹은 완전히 사랑스러운 느낌의 곡들로 주로 불렀다면 이 노래는 이전 노래들과는 달리 '서정적'이고 '몽환적'이었다.  


그리고 노래의 가사를 봤을 땐 감히 신세계를 엿보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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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날갯짓, 널 향한 이끌림,

나에게 따라오라 손짓한 것 같아서.

애절한 눈빛과 무언의 이야기.

가슴에 회오리가 몰아치던 그날 밤.

오묘한 그대의 모습에 넋을 놓고 하나뿐인 영혼을 뺏기고.

그대의 몸짓에 완전히 취해서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나인데.

왈츠처럼 사뿐히 앉아 눈을 뗄 수 없어.

시선이 자연스레 걸음마다 널 따라가잖아.

날 안내해줘. 그대가 살고 있는 곳에 나도 함께 데려가 줘. 세상의 끝이라도 뒤따라 갈 테니.

부디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말아 줘.

아침이 와도 사라지지 말아 줘.

꿈을 꾸는 걸음. 그댄 나만의 아름다운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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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가사를 살면서 처음 봤다.


'날갯짓', '무언의 이야기', '회오리가 몰아치는', '왈츠처럼 사뿐히 앉아',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말아 줘'...


'네가 보고 싶어', '널 사랑해', '네가 미워'와 같은 직설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이전의 노래에는 등장하지 않던 표현들이었다.


무언가 묘한, 내 깊은 감성 그 어디쯤을 건드리는 가사와 멜로디였다.


그리고 이 노래를 듣다 보니 '사랑하는 연인을 나비라고 표현한 것 같은데, 그리고 가사의 화자는 굉장히 슬퍼 보이는데 이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는 궁금증이 정말 자연스럽게 생겼다.


그래서 나는 네이버에 '엑소 나비소녀 가사 해석'을 곧바로 검색해봤다.

'가사'를 '해석'하고자 하는 욕구, 가사를 '자세하게 읽어보고자' 하는 욕구를 처음으로 경험해본 것이다.


검색 결과, 이러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은유적이고 몽환적이고 비유적인 이 가사의 내용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았고 그들 나름의 해석을 적어 내려 가는 사람들 또한 꽤 많았다.


그때 나는 아마도 가사는 멜로디라는 1인자 아래 있는 2인자가 아니라 멜로디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라는 걸 은연중에 깨달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거기까지였다.


'나비소녀'라는 노래는 꾸준히 즐겨 듣는 인생 곡이 되었지만 그 이후로는 노래의 가사가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은 적은 없었다.


그렇고 그런 노래들, 그냥 들을 만한 노래들, 가사는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부르니까 듣는 노래들을 그냥 플레이리스트에 가득 채워 넣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난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고 난 몇 년 후

인생 최대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하지만 그때 노래의 가사는

또 나를 찾아와 내 마음을 흔들었다.


———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동안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것임을 깨달아 슬펐고, 후회스러운 시기였다.

그리고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도 없었기에 내 몸과 마음속엔 불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나에겐 전혀 의지할 누군가가 없었다.


그 시기에 나는 늦은 밤 집 옥상에 올라가 달과 별과

밤 구름을 봤다.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 귀에는 자연스럽게 에어팟이 꽂혀 있었다.


'노래'라는 건 항상 현실의 힘든 상황과 나를 분리해주는 벽과 같은 것이었다. 어떠한 일상적인 소음 없이 오로지 내가 듣고 싶은 노래만 내 귓속에서 들릴 때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내 귀에 꽂혀 있던 에어팟에서는 이런저런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인디 음악, 힙합, 댄스곡, 발라드, 락 음악 등등.

나는 참 다양한 노래를 듣는 사람이었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노래만 들었다.

분명히 힘들고 슬픈 상황인데 눈물은 나오지 않고 마음만 계속해서 답답해져 갔다.



그렇게 한참 노래를 듣던 중 나는 한 구절의 가사를 듣고 비로소 울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 노래는 바로 아이유의 'love poem'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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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너의 세상에 별이 지고 있나 봐

숨죽여 삼킨 눈물이 여기 흐르는 듯해

할 말을 잃어 고요한 마음에 기억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I'll be there 홀로 걷는 너의 뒤에

Singing till the end 그치지 않을 이 노래

아주 커다란 숨을 쉬어 봐

소리 내 우는 법을 잊은 널 위해 부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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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커다란 숨을 쉬어 봐.

소리 내 우는 법을 잊은 널 위해 부를게'

이 부분이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정확하게 나의 마음을 위로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울음이 터진 순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나는 이 노래와 비슷한 결의 노래들을 한 데 모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힘들 때마다 변하지 않고 밤에 찾아와 주는 달과 별과 함께 그 노래들을 들었고

노래의 가사들을 들으며 위로받았다.


어느 날은 가사를 들으며

막막한 현실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고,

또 어느 날은 오늘 하루 고생 많았다는 가사를 들으며

나 자신을 다독였다.

또 어떤 날은 그래도 모든 건 다 지나간다는 가사를 들으며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렇게 노래와 가사와 함께 힘겨웠던 시절을 견디어냈다.


———


누구에게나 자신을 위로해주고 힘을 주는 문장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산다고 생각한다.

책에 나온 구절이든, 우연히 본 문장이든 그것들은 작고 사소한 것처럼 보여도 내 삶의 어딘가에서 내게 큰 힘을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에게 그것은 노래의 '가사'들이다.


노래를 들을 때, 그리고 여유롭게 노래의 가사를 음미할 때 나는 행복하다.


'노래'라는 건 잔향이 오래 남기에 좋은 예술이라 생각한다.

노래는 어느 한순간만 진한 향기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오래 지나 다시 마주쳐도 은은한 그때 그 향기를 풍긴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 좋은 노래를 만난다는 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행운이 가득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내 마음속에 들어온 노래는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물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난 '나비소녀'를 들으며 황홀해하고, 'love poem'을 들으며 마음이 시큰하게 위로받는다.


또다시 내 마음을 흔들어줄 그 노래를 찾기 위해,

나와 오랜 시간 함께해 줄 그 노래를 찾기 위해

오늘도 나는 여전히 설레는 마음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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