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환상적인 동화 이야기
어른을 위한 환상적인 동화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5
단편은 학창 시절 외에 읽은 적이 없어서 단편집을 보게 되었다. 장이모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가이고 중국에서 노벨상을 받은 작가라고 해서 고르기도 했다.
본명은 관모예(管謨業)로 글로만 뜻을 표할 뿐 "말하지 않는다"는 뜻의 '모옌(莫言)'은 필명이라고 한다.
모옌을 '환상적 사실주의'를 잘 나타낸다고 하는데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학사]에서는 콜롬비아의 작가 마르케스를 설명하면서 이 단어를 이렇게 정의했다.
환상적 사실주의- 마술적 사실주의라고도 하며 원래는 후기 표현주의 회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였으나 환상성과 사실주의를 결합시킨 중남미 문학의 특징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된다. 이성적인 현실 세게 내에서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벌어지지만 이런 자연과 초자연의 질서가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수 환상문학과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작품 해설을 보니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 카프카의 [변신], 야스나리의 [설국] 등을 탐독하며 모색하고 모방하며 서구의 문학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이를 흡수해서 모옌만의 문학적 본향을 구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포함하여 다수의 작품에 스며있는 특유의 정령신앙을 서양의 사조인 '환상적 사실주의'라고 단순하게 결부시킬 수 없는 것처럼 모옌의 작품 속 환상적인 이야기는 서양 사조와 상관없이 중국의 전통적인 전설과 괴담에 기초로 하고 있다.
따라서 서양 사조의 흐름에 단순히 비슷한 맥락이 보인다고 끼워 맞추는 무리수는 두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항상 역사는 힘 있는 자에 의해서 또한 서양 중심으로 서술되는 과오가 반복되는 경향이 있기에 이제는 이런 것들을 바로 잡으면서 동양의 가치를 제대로 발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투명한 빨간 무]는 중편이고 나머지는 모두 단편이다. 사실적이면서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듯한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이솝우화 같이 동물들도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 같아 동화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그런 적은 없지만 책을 읽다 보면 드라마에서 보던 시골 마을의 평상에 화톳불을 피우고 할머니가 부채질을 해주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가 희미하게 잠이 들면서 이야기를 베개 삼아 꿈나라고 떠나는 장면이 자꾸만 떠오른다. 뭔가 정감이 있는 풍경과 이야기가 계속 오버랩되면서 가슴이 참 따스해진다.
참 어려웠던 중국의 1900년대 이야기는 우리네 어려웠던 시절과 맥이 통하여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한 자녀 정책과 남아선호 사상으로 여자 아기면 남몰래 버리는 사회상을 담은 [영아유기]는 해바라기 밭에 버려진 여자아이를 주워 온 가정이 있는 아저씨의 갈등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인간적인 정에 이끌려 불쌍해서 데려왔지만, 사회 시스템이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아기를 키우지도, 어디에 맡기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해결이 어떠했는지는 보여주지 않고 의문을 던진 채 이 작품은 끝나는데 '나 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란 의문을 계속 품게 해 준 것 같다.
중국 공산당이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함께 일하고 함께 먹는다'란 미명 하에 인민공사를 시작하고 농업 대신 공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정책적 오류와 3년간의 대기황으로 극심한 식량부족과 절대 빈곤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음이 찡했다. 대개 절대적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옌의 단편과 중편에서 주로 다루고 있어 보는 내내 마음이 참 애잔했다.
[철의 아이]는 솥뚜껑도 먹고 총도 먹는 아이들을 보여주는데 마치 철을 먹는 철 도깨비를 생각나게 했다. 먹을 것이 없던 극심한 식량 부족의 상황에서 철도공사를 하면서 쌓인 철을 보며 철이라도 배부르게 먹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후미족]도 배고픔을 견디기 위한 우화 같다. 거의 썩기 진전의 죽만 먹던 아이가 옆집에 사는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은 진바오와 함께 음식 냄새에 홀려 우물로 들어가 맛난 음식을 냄새로만 맡는 후미족을 만나게 된다. 후미족이 남긴 음식을 원 없이 먹어도 되고 다 먹고 나자 춤까지 함께 춘다.
게다가 우물에 들어간 이 두 아이는 후미족이 잃어버렸던 후미족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언제든 사람들 몰래 음식을 먹고 싶으면 오라는 초대도 받는다.
아무도 몰래, 언제든 배 부르게 먹을 수 있는 보물 창고를 둔 기분은 배고플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어줄지.
단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큰 바람]이다.
"사람이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 그 먼 둥베이와까지 가서 이런 풀 한 포기를 가져오시더니, 글쎄, 이렇게 말씀 하지지 않겠니. '싱얼 돌아오면 보여 줘. 이게 무슨 풀인지, 그 애는 배운 게 많으니......' 그래 너는 알겠니?"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내게 풀을 건넸다. 나는 풀을 받아 소중하게 사진첩에 끼워 넣었다. 풀을 끼워 놓은 쪽에는 나보다 여섯 살 많은 약혼녀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이 작품에 나오는 할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고 손자인 싱얼이 고향집에 돌아가 할아버지와의 일을 상기하는 이야기인데, 할아버지가 참 멋지게 나온다. 마을에서 알아주는 농사꾼으로 일명 '붕붕 할아버지'라 불리는 할아버지는 농사꾼의 달인처럼 낫질이며 호미질, 수레질 등 보통의 농사꾼을 능가하는 실력을 보여주고 시간 날 때마다 호미, 낫, 괭이, 가래를 반짝반짝 손질하는 등 철두철미한 츤데레 농사꾼이다.
붕붕 할아버지는 아버지 없이 자란 싱얼과 며느리를 바르게 잘 챙기며 가장으로서 존경을 받는다. 싱얼이 어릴 적에 할아버지와 풀을 베러 간 날이다. 할아버지는 최상의 풀을 베고 어린 싱얼은 메뚜기를 잡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태풍이 올 것을 알아챈 할아버지와 싱얼은 서둘러 수레에 풀을 싣고 집으로 향했다.
거대한 큰 바람이 불어 수레가 뒤집히려는 상황에서도 붕붕 할아버지는 거대한 큰 바람과 맞짱을 뜨면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수레는 강둑에 서 있었고, 수레 뒤에 할아버지가 보였다. 할아버지는 두 손으로 수레 손잡이를 잡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등이 마치 활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할아버지 두 다리가 마치 못처럼 강둑에 박혀 있었다. 다리 근육이 마치 나무뿌리처럼 가닥가닥 불거져 있었다. 수레 위의 반쯤 건조된 띠들이 바람에 실려 공중에 나풀거렸다. 수레가 부들부들 떨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할 만도 할 텐데 완벽한 농사의 달인 붕붕 할아버지는 자기 앞에서 수레를 뒤집히게 둘 수 없다는 의지로 끝까지 버텨낸다. 마치 멜빌의 [백경]에서 노인이 고래를 잡기 위한 사투를 벌이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에 힘들게 벤 최상의 풀인 띠는 모두 바람에 날려가고 수레는 빈 수레가 되었으나 결코 뒤집히지는 않았다. [백경]에서도 고래의 살은 돌아오는 길에 물고기들의 밥이 되어 뼈만 앙상한 채 돌아온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결과를 따지지 않고 역경에 맞서 굳센 의지로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을 지켜낸 인간의 의지에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과묵하지만 깊은 정이 있는 붕붕 할아버지가 영웅처럼 멋지게 보이기만 했다.
아마도 붕붕 할아버지도 그의 인생의 가장 멋진 때가 그때라 여겨서 죽기 전에 그때의 풀을 손자에게 전해달라고 한 것이 아닐는지.
중편인 [투명한 빨간 무]는 묘사나 서사가 좋았지만, 아직 나의 내공이 깊지 않아서 깊게 이해는 못했다. 그래도 여기에 나오는 인물인 헤이하이, 쥐즈, 젊은 석공, 늙은 철공들의 인간적인 면모가 가슴을 따스하게 해 주었고, 욕심쟁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젊은 철공의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특히나 헤이하이가 '투명한 빨간 무'를 찾기 위해 무 밭에서 무를 마구잡이로 뽑아내며 확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알아보니 그 이유는 작가의 경험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한다. 모옌이 학교에서 제적당한 뒤 14살(1968)의 나이로 헤이하이처럼 홍수 방지 댐 건설에 참가하게 되는데 너무 배가 고파 무를 훔쳐 먹다가 걸린 뒤 마오쩌둥의 동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모티브로 삼아 [투명한 빨간 무]를 탄생시켰나 보다. 농업사회에서의 '무'는 투명하게 빨갛지 않다. 철공들의 불판 위에서만 이글이글 익으면서 투명한 빨간 무가 되기 때문에 공업 사회에서의 '무'를 헤이하이는 택한 것이다.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중국은 농업 대신 공업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변화가 함께 있었다.
뭔가 묘한 인간보다 정령에 가까운 헤이하이의 행동들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중편을 마친 것 같다.
모옌은 이러한 변화와 아픔을 몽환적인 동화 같은 분위기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농업시대에 절대적 가난으로 모두 힘들었지만, 동화같이 몽글몽글 따스한 느낌이 드는 건 그 안의 인간들이 모두 따스한 정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가운 공업 사회에서도 우리가 인간의 정을 놓지 않는다면 공업 사회도 인간적으로 살아갈만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메시지 말이다.
고전의 명작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웹소설처럼 가벼운 재미는 없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배울 수 있기에 계속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읽히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읽고 나면, 뭔가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깊숙하게 스며들고, 생각지 못한 무언가를 안에서 끄집어내는 그런 묘한 힘을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리학 책은 아니지만, 인간의 내면을 참 묘하게도 잘 드러내면서 읽는 독자의 내면까지 뒤집어 살펴보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그래서 초보인 내게 고전은 다소 지루하다고 생각되면서도 뭔가 깊은 울림의 한 방을 맞기 위해 참고 읽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