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5일
일어나 나갈 준비 후 조식을 먹었다. 벨지안 할머니는 벌써 식사를 마친 후 나가려던 참이었고, 이곳의 조식 양이 너무 적다며 불만을 표했다. 듣고 보니 가격에 비해서 부실하긴 했던 것 같다.
너무 피곤했다. 걸으면서까지 졸린 건 처음이었다. 다음 마을인 로그로뇨에서 멈출지 고민을 했다.
하지만 로그로뇨에는 오전 9시 반이면 도착이었다. 알베르게 체크인은 2시부터니 그때까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천천히 걷고 중간중간 쉬어주며 몸 상태를 살피기로 했다.
로그로뇨에 도착했다.
구글에서 평점이 좋은 포르투갈 음식점을 찾아갔는데 역시나 이른 시간이라 닫혀 있었다.
오는 길에 봤던 카페로 되돌아가 카페콘레체를 주문했다. 서비스로 미니 크루아상을 함께 주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스페인어만 할 줄 아는 분이어서 손짓 발짓과 아주 단순한 단어로 겨우 대화를 했다. 대충 혼자 순례길을 걷다니 용감하다~ 응원한다~하는 말씀이신 것 같았다. 먹고 쉬었더니 힘이 좀 났다. 다시 걸어보기로 했다.
큰 마을이니 마켓이 잘 되어 있을 것 같았다. Laura와 먹었던 식사가 생각났다. 그때와 비슷하게 장을 봐 숙소에서 먹고 싶었다. 구글 지도로 찾아보니 가까운 곳에 까르푸가 있었다.
흑토마토, 루꼴라, 치즈, 잠봉을 샀다.(분명 샌드위치를 해먹었던 거 같은데, 빵은 안 샀던가?) 루꼴라가 이만큼에 이천 원도 안 됐다. 한국에서 사려면 칠팔천 원은 될 것이다.
며칠 전 먹었던 하몽의 맛이 잊혀지지 않았다. 마트를 나가 걷는 길에 하몽 전문점을 들렀다.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적당한 가격의 하몽을 100g 정도 사고 싶다고 했더니 알맞은 것으로 내주었다.
도시를 나가는 길에 6살 어린 한국인 청년을 마주쳤다. 그를 B군이라 부르겠다. Star와 함께 걷던 날 잠시 인사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얼떨결에 그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세 시간 정도를 B군과 걸었다. 정오를 지나며 무척 더워졌다. 나바레떼 직전의 길은 그늘이 별로 없는 도롯가였다. 빨리 도착해 쉬고 싶은 마음에 걸음이 엄청 빨라졌던 것 같다. 내 페이스에 맞춰 걷던 B는 목적지에 다다라 발에 통증을 호소했다. 물집이 잡힌 것 같다고 했다.
숙박 15유로
나바레떼는 빙글빙글 돌며 올라가야 하는 독특한 마을이었다. B는 다음 마을까지 가기로 했는데, 간만에 한국인을 만나 좋았는지 나를 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내가 묵으려는 알베르게에 바가 있다면 콜라를 한잔하고 가겠다고 했다.
https://maps.app.goo.gl/6m7NyCAw2q4iYDR59
안타깝게도 알베르게에 바는 없었다. 발이 아픈 B는 다음 마을까지 동키(짐 배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지 통역을 부탁했다. 주인은 동키가 아침마다 짐을 싣고 떠나기 때문에 오후인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무거운 가방을 멨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숙소의 컨디션은 좋았으나 숙박만 15유로라니 비싼 편이었다. 침대를 정하고 짐을 풀고 씻은 뒤 빨래까지 마쳤다.
애인과 영상통화를 하며 장을 봐온 재료로 샌드위치를 해먹었다. 통화하느라 음식 사진은 못 찍었다. 구글 맵으로 보니 이 작은 마을에도 까르푸가 있길래 구경하러 나갔다.
새싹야채, 후무스, 요거트, 맥주를 샀다. 특이하게 요거트에는 초코칩이 들어있었는데 너무 맛있었다.(왜 한국에서는 안 만들지?) 이후로 마트에서 보일 때마다 사 먹었다.
쉬고 있는데 Arnd와 Holger가 숙소로 들어왔다. 저녁 먹는 시간이 맞아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얘기를 나눴다. Arnd는 전기공, Holger는 외과의사로 일하다 은퇴하고 이곳에 온 것이라 했다. 그들은 독일에서부터 함께 걸어온 길들의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오늘 사 온 재료들에 맥주를 마셨고, 그들은 소세지를 먹으며 와인을 마셨다. 안주로 먹으라고 내 치즈를 좀 나눠주었다.
하루 종일 까르푸에서 산 음식들로 배를 채웠는데 아주 맛있고 저렴했다. 남은 기간 동안은 마켓을 애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B는 내가 선호하는 인간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언행들이 내 기준으로는 가볍고 거칠게 느껴졌다. 한국에서였다면 아마 어울릴 일이 전혀 없었을 사람이라는 판단이 빠르게 섰다. 몇 시간의 대화로 미루어 보아 서로가 가치관의 극단에 서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나는 서로를 챙겨주며 꽤 긴 시간을 함께 걸었다. 그리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해 초 흥미롭게 봤던 프로그램이 있다. "더 커뮤니티: 사상검증구역"이다. 출연진들은 네 가지의 척도로 사상이 검증된다. 정치성향(좌파-우파), 젠더(페미니즘-이퀄리즘), 계급(서민-부유), 개방성(개방-전통). 각 성향은 1점에서 3점까지 나뉘며 각기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모든 사상이 한 쪽으로 확연히 치우친 편이기에, 그 정반대에 있는 출연진들에 대한 약간의 비호감을 가진 채 시청을 시작했다. 하지만 차츰 프로그램이 진행될수록 몇몇에게서 의외의 면들을 발견하게 됐다. 한 명 한 명을 사상이 아닌 인간으로 바라보며 내 안의 편견이 옅어져갔다. 신념이 뚜렷하고 강한 편인 나에게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모든 인간은 단 몇 가지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복합적인 존재이며, 그런 다양함이 모여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사회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가치관이 정반대인 사람들과도 조화롭게 지낼 수 있다. 다채롭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