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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10(나바레떼-나헤라)

2024년 8월 6일

by 소로


나바레떼-나헤라(17.1km)(2024.8.6.)




늦잠을 잤다. 6시에 일어나 준비 후 출발했다.

하늘이 이미 밝아져 있었다.




해가 떠오르고 있다.





컨디션 난조였다. 오늘따라 배낭이 너무 무거웠다. 승모근이 땡기고 왼쪽 발도 아팠다. 다운된 상태로 두 시간을 걷다가 첫 마을에 도달했다. 마을 초입부터 바까지 도착하는 20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다


간신히 바에 도착했을 때 친절한 스페인 아저씨가 함께 앉자고 했다.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 나누던 중 Arnd와 Holger도 도착해 합류했다. 웃으며 대화를 했더니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역시 사람과 함께할 때 받게 되는 좋은 에너지가 있다.

마을을 나오며 찍었던 것 같다.




기존 계획은 아조프라까지였다.(22.5km) 그런데 부엔까미노 앱을 보니 아조프라의 공립 알베르게가 폐쇄 중이었다. 만일 아조프라까지 갔다가 숙소가 없으면 한 마을 더 가야 하는데 컨디션이 따라주지 못할 것 같았다. 그전 마을인 나헤라까지만 걷기로 결정했다.

내 기분처럼 흐린 하늘.
웃으며 사진 찍을 힘도 없었다.




걷다 보면 포도밭들을 지나게 되는데, 잘 익은 포도송이를 볼 때마다 따먹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엄연히 와인 농장에서 수익을 위해 재배하는 것이니 소심하게 몇 알만 떼어 맛을 보았다. 한국의 포도보다 알이 작고 단단했는데 정말 달고 새콤했다.




벤치에 앉아 어제 남겨둔 음식들을 점심으로 먹었다.





고양이 두 마리가 다가왔다. 엄마와 아기처럼 보였다. 내 짐을 뒤적이고 야옹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남은 게 전부 짠 음식이라 줄 수가 없었다.


배고플 텐데 미안해..





식사를 마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올리브밭도 많았다. 올리브 잎의 색이 오묘하고 은은했다.
벤치가 보일 때마다 쉬었다.



하늘이 조금씩 맑아져 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포도나무.
이름 모를 예쁜 꽃.
어떤 베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까맣게 익은 것을 따먹었다.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도착한 나헤라. 희한하게 생긴 마을이었다. 약간 고대의 도시 같기도 하고. 날씨는 완벽히 맑아져 있었다.




숙소에 거의 다 왔을 때 흑인들이 니하오를 시전했다. 처음으로 마주친 선명한 인종차별이 당황스러웠다. 대응할 기운도 없어 그냥 무시하고 지나왔다.








Albergue Puerta de Nájera


숙박 15유로


https://maps.app.goo.gl/8WbcnjDKDEdSQi5n9




오픈이 2시부터라 잠시 기다리다가 체크인을 했다. 빠르게 씻고 나와 4유로를 내고 세탁기를 사용했다. 오늘의 체력으로 손빨래는 불가능이었다.


빨래를 기다리며 애인과 통화를 했다.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라면스프 스틱으로 국물을 만들어 마시려고 했다가 마음을 접었다. 숙소에 있는 커피포트의 위생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숙소의 컨셉도 이 도시만큼이나 희한했다.




나헤라에는 볶음밥이 유명한 중국음식점이 있다. "Sofia Restauraente". 4시부터 8시까지 씨에스타길래 빨래를 널고 곧바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https://maps.app.goo.gl/cuCGGE99ddoRXg6n6



그곳에서 M, K님 부부를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두 분은 볶음밥 두 종류와 튀김요리를 시켰고 나는 볶음면을 주문했다. 볶음면이 훨씬 맛있던데 왜 볶음밥이 더 유명한지 모르겠다.

볶음면은 사진을 못 찍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래의 친구들과 한식과 비슷한 음식을 먹으며 편하게 대화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서로 사주겠다며 한국식 밀고 당기기를 하다가 결국 적당히 음식값을 나눠서 냈다. 대도시에서 만나면 또 같이 맛있는 것을 먹자고 약속하며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간식으로 과일을 사 왔다. 블루베리가 저렴해서 숟가락으로 퍼먹을 수도 있었다. 부자가 된 느낌.

250g에 3500원이었다.




그리고는 무려 5시 반부터 잠에 들었다.












우울하고 예민하고 힘들었던 하루. 전일 애인과 통화하며 신경 쓰이는 소식을 들었는데, 걷는 내내 그것에 대한 생각을 떨 수가 없었다.


길 위에서 나는 매일 무엇을 먹고 어떻게 걷고 어디에서 잘지만 고민했다. 일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생존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고민만 해도 된다는 사실이 제법 편리했다.


한국에 털어놓고 온 현실을 전화 한 통으로 상기시키며 찐득한 현실감각을 느꼈다. 멀어져 있을 때 가벼웠던 만큼 그 무게가 묵직했다. 내가 외면했을 뿐, 현실은 여전히 나의 바로 코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혼자 영상을 찍으며 중얼중얼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마음이 갈무리되었다. 무엇보다 솔직하게 상황을 말해주고 의견을 물어봐준 애인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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