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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마을 위빳사나 집중수행-1(그리고 뚜쥬루를 곁들인)

2025년 1월 10일

by 소로


호두마을 위빳사나 집중수행
2025.1.10.~1.13.(3박 4일)




예전부터 명상을 배워보고 싶었다. 나는 생각이 많고 한번 시작하면 깊게까지 파고 들어가는 편이기 때문이다. 또 마음이 나의 내면보다 타인이나 외부의 자극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준비물
· 전기장판, 극세사 이불(필수)
· 보온 텀블러(개인적으로는 필수라고 생각)
· 겨울옷 여러 개 - 법당 안에서 입을 옷은 패딩보단 소리 나지 않는 재질로
· 히트텍, 속옷, 수면양말, 수건
· 클렌징크림, 클렌징폼, 샴푸, 바디워시, 칫솔, 치약
· 스킨, 로션, 겨울용 수분크림, 핸드크림, 립밤, 헤어에센스,선크림 - 전부 무향이거나 향이 약한 것
· 알람시계
· 노트, 필기구
· 실내용 슬리퍼(거의 안 썼다.)
· 간식(안 챙겨갔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호두마을로 여러 번 검색을 해보았으나 후기가 많지는 않았다. 센터 사무실에도 문의해 보고 몇 개 없는 후기를 추려 준비물들을 꼼꼼히 챙겨갔다. 딱히 부족하거나 아쉬운 것들은 없었으니 잘 챙겨간 것 같다.








천안 뚜쥬루 빵돌가마마을



호두마을은 6시, 11시에만 공양이 있다. 5시에는 주스나 미숫가루만을 제공해 준다. 저녁에 배고플 것 같아 천안까지 간 김에 뚜쥬루를 들렀다.


[네이버 지도]

뚜쥬루 빵돌가마마을

충남 천안시 동남구 풍세로 706

https://naver.me/5WBQ9H5I


딸기생크림빵, 쑥인절미크림빵, 거북이빵, 돌가마만주, 호두정과를 샀다. 여기서 한두 개만 먹고 남은 것은 호두마을에서 배고플 때마다 간식으로 먹을 것이었다. 빵을 사들고 2층 카페로 올라갔다. 호두마을에서는 수행 기간 동안 마음을 흔드는 음료를 제한한다. 아직 입소 전이지만 영향을 미칠까 해서 디카페인 커피로 주문하려고 했으나 옵션이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일반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나는 술을 거의 끊은 뒤 군것질을 탐닉하기 시작하면서 빵과 디저트에 있어서는 기준이 하늘과 같이 높아졌다.(^^..) 그런데 이곳의 딸기생크림빵을 잘라 입에 넣는 순간 귀에서 상투스가 울렸다. '이건 진짜다....!'

생크림은 꽉 찬 맛이 나면서도 담백 그 자체였다. 질 낮은 크림에서 느껴지는 기름짐과 느끼함, 이상한 향이 전혀 없었다. 빵도 정말 깔끔하고 풍미가 좋았다. 좋은 재료를 쓴다고 하더니, 그저 먹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일반 빵을 먹더라도 재료가 좋지 않으면 속이 더부룩해지는데, 여기 건 크림이 가득한 것을 한 개 다 먹었는데도 속이 편안했다. 딸기생크림빵 하나만 먹으려다가 다른 것들도 궁금해져서 거북이빵과 쑥인절미크림빵도 조금씩 뜯어 맛보았다.

천안 사람들 부럽네..








호두마을 위빳사나 명상 집중수행-첫째날(2025.1.10.)



한 달 전쯤 문자로 예약하고 생활비를 입금했다. 금액은 1일 당 4만 원. 총 28만 원이었다.

첫날은 5시까지만 가면 된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저 마시고 호두마을로 출발했다. 뚜쥬루 빵돌가마마을에서 2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등록하고 설명을 들었다. 코팅된 안내문과 베갯잇, 침대 보, 이불보, 방석 시트를 주시며 퇴소할 때 반납해달라고 했다.


겨우내 내렸을 눈이 아직도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핸드폰을 끈 채로 차에 두고 내렸기에 여기부터는 사진이 없다.

배정받은 방은 202호였다. 난방을 켜두셨다고는 했지만 방이 무척 추웠다. 전기장판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하루도 있지 못했을 것이다.


7시에 법문이 있다고 했다. 기다리며 천천히 짐을 풀고 정리를 했다. 5시에는 식당으로 내려가 미숫가루를 한 잔 타먹었다.



첫 법문은 위빳사나의 기초를 포함하여 수행의 목적,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위빳사나는 위+빳사나의 합성어이다. "위"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빳사나"는 "꿰뚫어 보다, 똑바로 알다."는 뜻이다. 즉, 위빳사나는 모든 것을 관찰하여 제대로 아는 것을 뜻한다.

"모든 것"은 물질과 정신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은 분명하게 경험하고 있는 "신체"를 이야기한다. 설명이 전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지수화풍의 네 가지 성질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물질에 해당된다고 하셨다. 예를 들어 뼈나 근육의 단단함, 무거움, 지탱함.(땅의 요소) 눈물 등 분비물의 차가움, 내려감, 아래로 흐름.(수의 요소) 체온의 뜨거움, 올라감.(화의 요소) 신체를 움직임, 이동함.(풍의 요소)

반면 정신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생각과 느낌, 감정, 그리고 뭔가 하려고 하는 의도까지 포함된다.


물질과 정신은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맡을 때마다, 맛을 볼 때마다, 만지거나 닿을 때마다,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느낄 때마다 생겨난다. 우리는 이러한 물질과 정신을 "나"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사실 나는 물질과 정신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는 구분된 존재인데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일로 인해 분노가 일 때 "나는 지금 화가 나."라고 말하고 스스로 그 분노 자체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마음속에서 분노라는 정신 작용이 생겨났을 뿐이고, 우리는 그것을 관찰함으로써 분리하고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위빳사나는 "관찰"을 통한 수행을 강조한다. 분노가 일어날 때 그 감정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성냄, 성냄, 성냄.' 그 순간 그것과 분리되어 멀어진 자신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꾸준히 수행하다 보면 점점 번뇌와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구체적인 수행으로는 좌선법, 행선법, 일상수행법 세 가지가 있다.

좌선법은 가부좌 자세로 앉아 호흡에 집중하는 방법이다. 배의 오르내림을 "부품-꺼짐"으로 관찰한다. 그러는 사이 망상이 들면 "생각함, 생각함, 생각함." 혹은 "망상함, 망상함, 망상함."으로 명칭을 붙인다. 만일 구체적인 망상을 통해 어떠한 감정까지 느껴진다면 그 감정에도 이름을 붙인다. "수치심, 수치심, 수치심."처럼 말이다. 졸음이 몰려올 땐 "졸림, 졸림, 졸림." 혹은 눈꺼풀의 무거움을 느끼며 "무거움, 무거움, 무거움."을 생각한다. 지루할 때도 "지겨움, 지겨움, 지겨움."을 되뇐다. "부품-꺼짐"이 오래 반복되어 힘들면 "앉음-닿음"으로 변경하여 수행할 수도 있다. "앉음" 시엔 앉아있는 몸의 모양새, 무거움을 느끼고, "닿음"시엔 바닥에 닿아있는 엉덩이 전체의 면적 혹은 오른쪽 엉덩이, 왼쪽 무릎 등 특정 부위에 집중하며 느낄 수도 있다.


행선법은 걸으며 관찰하는 방법이다. 천천히 걷는 동안 다리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처음 수행 시엔 "왼발-오른발"로 이름을 붙인다. 경행 시 주의할 점은 발을 내려놓을 때 발바닥 전체를 한꺼번에 내려놓는다. 또 한 쪽 발이 떨어지고, 가고, 바닥에 닿을 때까지 다른 쪽 발은 가만히 두어야 한다.(왼 발이 닿는 동시에 오른발이 떨어지면 안 된다.) 한 번에 하나의 움직임에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벽 끝까지 도착하면 "섬, 섬, 섬."을 되뇌며 멈춰 선 몸을 관찰한다. 돌 때는 한 번에 돌지 않고 조금씩 나눠 돌며 "돎, 돎, 돎." 으로 이름 붙인다. 수행이 익숙해지면 좀 더 세분화하여 관찰할 수 있다. "듦-놓음" 2단계, 혹은 "듦-감-놓음" 3단계도 가능하다. 센터에서는 좌선과 행선을 한 시간씩 번갈아 했는데, 좌선 전에 꼭 행선을 먼저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일상수행법은 눈 뜬 후 잠에 들 때까지 매 순간 하는 행동과 생각에 대한 관찰을 이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밥을 먹을 때도 숟가락을 들 때, 입으로 가져올 때, 입에 넣을 때, 씹을 때 등 순간순간의 행동에 명칭을 붙여 관찰한다.


위빳사나에서는 "끊어지지 않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다. 예를 들어 행선이 끝났다고 "휴~" 한숨 쉬고 재빠르게 걸어가 털썩 주저앉아 좌선을 시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좌선을 하는 자리까지도 계속 행선을 하며 이동하고 도착해서는 천천히 앉는다. 앉는 순간에도 "굽힘, 굽힘, 굽힘.", 가부좌를 틀 때도 "구부림", "내림", "닿음" 등으로 명칭을 붙이며 관찰한다. 마찬가지로 법당을 나와서도 가능한 한 끊어지지 않게 일상수행법을 이어가야 한다.










첫날 법문 중 "분명한 것에만 집중하라"는 말씀이 인상 깊었다.

나는 분명하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하려는 습관이 있다. 분명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답답함과 불안을 싫어하니 추가적으로 정보를 탐색하거나 생각을 거듭하고 분석하며 분명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히 집착이 생긴다. 분명해질 때까지 붙잡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분명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 않은 것이 본 모습이다. 그것을 애써 분명하게 만들고 정의 내리는 과정에서 사실보다 과장된 결론이 나거나 아예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말씀 끝에 "분명한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라고 질문하였다. 스님께서는 "내 마음이 가는 곳이 분명한 곳입니다. 예를 들어, 부품-꺼짐 수행 중 분명하지 않은 망상이 든다면 그냥 흘려보내십시오. 망상이 분명하여 마음이 갈 시에만 집중하여 관찰하세요."라고 하셨다. 이는 명상 수행 도중에 국한된 설명이었으니 그 부분에 한해서만 적용하도록 하고, 내 습관에 비추어서는 조금 다르게 적용해 본다.

"내 마음이 가더라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라면 흘려보내는 것."

첫째 날 느낀 가장 큰 교훈이었다.




불편한 것들이 많다. 방 안에 있어도 공기가 시리다. 온수는 나오지 않고 세면대는 역류한다. 찬물을 살짝 틀어 조심조심 고양이 세수를 한다. 그럼에도 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세상의 온갖 자극들, 시답잖은 걱정거리들과 멀어져 스스로에게만 집중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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