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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랑크톤 Jul 01. 2024

우울증과 취향

2024년 5월 14일



 약 일주일 만에 햇볕에 바싹 말려진 기분이다. 살 것 같다.


 어젯밤 잠도 너무 잘 잤고 쨍하니 날씨도 좋고 출근길에 스벅에 들러 달달한 음료도 한 잔 사 왔다. 우울감이 사라질 때는 이렇게 말끔하고 개운한 기분이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전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억울한 심정이 된다. 항우울제를 먹었을 때는 대부분 이런 기분으로 지낼 수 있었는데, 약을 끊은 이유는 약을 먹는 내가 진짜 나 같지 않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그놈의 '진짜 나'가 뭐길래 우울감을 견디고 사느냐 반문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불교의 '무아'의 개념으로 봐도 어이없는 주장이기는 하다) 우울감은 아주 어릴 적부터 내 가장 가까운 곁에서 나의 모든 가치관과 취향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우울증에 걸려있던 어린 나는 자우림과 라디오헤드를 들었고 흑인 R&B와 재즈의 깊은 맛을 알았다. 그 당시 아무도 듣지 않던 힙합을 남몰래 들으며 X같은 세상에 대한 반항을 이입했다. 스킨스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퇴폐적인 인물들에게 매력을 느꼈고, 팀 버튼의 밝은 가면을 씌운 섬찟한 연출들을 애정했다. 독특하고 강렬한 반 고흐의 그림들과 그의 기구하고도 특별한 인생에 매료되기도 했다. 구린 현실을 피해 허구의 세계들을 탐닉했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대런 섄과 같은 명작들을 접했다.(아직도 나는 해리포터보다 대런 섄이 월등히 재밌다고 생각한다.) 무언가에 꽂히면 일분일초를 놓치지 않고 핥고 음미해야 하는 지금의 성격은 그 우울한 오타쿠 시절의 나로부터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차근차근 거치며 지금의 나는 인생의 기쁨을 표현하는 작가들보다는 클림트, 뭉크, 마크 로스코, 살바도르 달리, 아니쉬 카푸어의 서늘하고도 기괴한 아름다움에 심장이 떨리는 인간으로 자랐다. 생기 있고 즐거운 영화들보다 박찬욱, 아리 애스터,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섬세하게 그려내는 괴상하고 축축한 작품들에 끌려하는 인간이 되었다. 진짜 아이유보다는 어둠의 아이유라고 불리는 비비가 미치도록 취향인, 우효의 맑은 목소리로 불러지는 울적한 가사들에 심취한 채 눈물을 흘리는 인간이 되었다. 인간의 본성과 인생의 본질에 대한 염세적인 시각으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가지는 또는 가져야만 하는 의미에 대해 평생에 걸쳐 사투해왔으며 동시에 그 과정이 묵직한 나의 일부가 되었다.


 종종 이렇게 산뜻하고 가벼운 하루를 만날 때, 이게 원래 나였다면 인생이 몇 백배로 간단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켜켜이 쌓아 올린 나만의 취향과 감성으로 돌아가 그 품에 안길 땐, 마치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고향에 도착한 듯 아늑하면서도 괴로운 그 느낌을 사랑하고야 만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나 역시 그 자체로 사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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