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셀프 힐 링 Jul 27. 2021

가짜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의작품 "어느가족" 영화를 본 후.




 이 영화는 2018년 칸 영화제 최고상 수장 작품이다. 7월에 개봉하여 겨우 17만 명의 관객 수를 동원했으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라 더욱 관심이 컸다. 사회문제와 모순들을 비상식적인 가족 구도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감독의 메시지는 다분히 변태적이지만, 관객으로부터 절대적 공감을 받은 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재된 가족에 대한 바른 정의를 간접적으로 대변해 주기 때문이다.  

  

하츠에(할머니) - 죽은 남편의 연금으로 살아감

오사무(남자:아버지)와 노부요(여자:엄마) - 손님으로 만난 내연관계로 폭력에 시달리는 노부요를 구하려다가 전 남편을 살해하는 공범이 됨.

아키( 하츠에의 손녀) - 첩의 자식의 딸이며 가출해서 할머니와 살고 있음.

쇼타(어린 남자아이)와 유리(어린 여자아이) - 친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  


이렇게 6명으로 구성된 가짜 가족이다.    

 

첫 장면부터가 심상치 않다. 아버지(오사무)는 아들(쇼타)에게 도둑질을 가르치고 성공적인 거사에 미소를 나눈다. 마치 매일 먹는 식사처럼 편안하고 익숙하다. 돌아오는 길에 집 밖으로 쫓겨나 추위에 떨고 있는 유리를 데리고 온다. 노부요(엄마)의 반대로 잠든 아이를 다시 엎고 가지만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다”라며 격렬히 싸우고 있는 부부의 말을 듣고 되돌아온다. 아동학대의 흔적들, 멍든 곳에 약을 발라주는 할머니의 모습과 몸값을 요구하지 않았으니 유괴가 아니라는 그들만의 도덕과 윤리관으로 서로를 인정하며 새로운 가족의 체계와 질서를 만들어 간다. 유리는 이들과 가족이 되어 조금씩 웃음을 찾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TV를 통해 자신을 찾는다는 친부모의 소식을 듣게 된다. 어린이집의 신고와 상담사의 방문으로 경찰이 실종신고를 한 것이다. 그러나 유리는 돌아가지 않는다. ‘린’이란 이름으로 살기를 원한다. 긴 머리를 자르고 할머니가 지은 옷을 입으며 행복해한다. 비로소 활짝 웃는다. 결국 버려진 아이가 부모를 선택하는 가슴 아픈 순간이다. 친부모에게 버림받고서야 비로소 활짝 웃는 유리.   

  



노부요의 팔에 있는 다리미 자국과 린의 팔에 있는 자국이 같은 것을 발견한다.



목욕을 마친 노부요는 린이 입고 온 옷을 태우며 “사랑하니까 때린다는 건 거짓말이야. 사랑한다면 이렇게 하는 거야 이렇게 꼬옥!”라고 말하며 뒤에서 안아준다.  흐르는 눈물을  린이 닦아주고 있다. 진짜 엄마를 위로하듯 말이다.    


  




허수아비가 하나쯤 있을법한 들판에 벼가 익어가는 즈음이다. 고향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그림같이 한가롭다.



가로지르는 기차에 바다로 여행 가는 가족이 있다. 내일이 없어져도 괜찮을 것처럼 행복하다. 진정한 가족의 냄새가 난다.  

                 


오사무에게 성을 배우는 쇼타가 진정한 부자이다.


    

“피가 안 섞였으니 좋아"   "괜한 기대를 안 해도 되지”   “다들 고마웠어...”    

죽음을 예감하듯 함께라서 행복했던 가족들을 할머니는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마지막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할머니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비록 할머니의 연금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가족이었으나 단란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 돈 때문에 할머니의 죽음을 은폐한다. 도둑질을 가르치는 아버지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이다. 할머니의 시체를 집안에 묻고, 틀이 속에서 찾은 돈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하는 오사무와 노부요를 바라보며 쇼타는 여동생에게는 도둑질을 시키지 말라는 가게 아저씨 말을 마음에 새기는 듯하다. 나쁜 것을 구분하는 눈이 생긴 것이다. 할머니의 연금을 은행에서 찾아오는 노부요에게 누구의 돈이냐고 물어본다. 또다시 묻는다. 물건을 훔치는 것이 나쁜 것이냐고 말이다. 가게가 망하지 않을 정도만 가져오면 된다고 대답한다. 이들이 진짜 가족이 될 수 없는 이유였다.


    


다시 물건을 훔치러 가는 쇼타와 린.


동생에게 도둑질을 가르치지 말라고 말한 동네 가게로 간다. 행복하고 다정했던 가족에게서 배운 것들과 다름에 대한 혼란을 쇼타는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문이 닫혀 있다.

다시 큰 마트로 들어간다. 쇼타는 린을 가담시키지 않았으나 린 스스로 오빠가 하는 짓을 따라 하고 있다. 린이 과자를 들고 돌아서는 순간 쇼타는 가게 직원이 보는 곳에서 밀감 봉지를 들고 달아난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동생에게 도둑질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쇼타의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쇼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막다른 길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지게 되고 경찰은 이 가족의 실체를 샅샅이 파헤친다. 서로를 속이며 살아왔던 모든 진실들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가족이 해체되는 순간에도 노부요는 낳았다고 다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라며 세상을 향해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모든 것들을 혼자 짊어진 채 5년 형을 받는다. 그녀의 눈물이 진정한 가족으로 살았음을 대변하고는 있으나 돈, 그들을 연결하고 있는 돈이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쇼타는 아버지와 하루를 같이 보내고 보호기관으로 돌아가게 된다. 친구 같은 부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고백한다. 일부러 들켰노라고. 당신들의 방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쇼타는 이들과 진짜 가족이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떠나는 버스를 따라 힘껏 달리는 오사무는 쇼타의 이름을 목놓아 부른다. 한 참 후 쇼타는 뒤를 돌아본다. “아빠..”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들을 수 없기에 불러본다는 듯이 한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 부자의 정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린은 가짜 가족과의 추억을 가지고 친부모에게로 돌아갔다. 다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세상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린, 한 아이의 절망적인 저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여전히 폭행은 계속될 것이고 그들은 또다시 방관자가 될 것이다. 비록 뿔뿔이 흩어졌지만 ‘어느 가족’이란 영화는 진정한 가족이 무엇인가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는 영화였다.    




 점점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져 간다. 사회의 제도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만큼의 다양한 해석과 이론이 쏟아지지만, 근간을 흔들지는 못한다는 교훈이 있다.

가족은, 사랑이 절대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나 사랑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말하고 있다.   



“낳으면 다 엄마가 됩니까” 노부요가 묻는다.

“안 낳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 상담사는 대답한다.

“두 아이는 당신을 뭐라고 불렀나요” 이번엔 상담사가 묻는다.


한동안 노부요는 대답을 못하고 울기만 한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쓸어낸다.

머리 위로 턱 아래로.


“글쎄요... 뭐라고 불렀을까요?”

노부요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외면했던 진실의 베일이 벗겨진다.




동정은 했으나 가슴으로 낳지 않았음을.

그래서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눈물이 대답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서적 조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