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셀프 힐 링 Sep 07. 2021

사랑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언어의 온도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를 읽다가 “사랑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란 소제목에서 멈추었다.   

  

어제는 노트북을 켜고 ‘사람’을 입력하려다 실수로 ‘삶’을 쳤다. 그러고 보니 ‘사람’에서 슬며시 받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은밀하게 모음을 빼면 ‘삶’이 된다(중략). 세 단어가 닮아서일까. 사랑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사랑이 끼어들지 않는 삶도 없는 듯하다(중략).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p 119)    


 실수가 때로는 사람의 정곡을 찌르기도 하고 자신도 몰랐던 진실 앞에 세우기도 한다. 삶의 본질에 대해 우린 다양한 해석을 내놓거나 음미하기를 좋아한다고 작가도 말했듯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미발달 상태로 내 안에 존재하는, 그러면서도 나조차 지각하지 못한 뭔가로 인해 타인의 모습에서 나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 삶일 것이다. 마주 선 자신과의 밀도 있는 만남과 통찰로 인해  민낯을 담대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면 필경,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사랑의 힘이 아닐는지 감히 짐작해 본다.    









 세상 귀한 분이 이사 후 첫 손님으로 다녀가시면서 인생의 참만남을 놓고 가셨다. 꽉 찬 느낌이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역시 사람이 존재한다는 말씀을 얼른 주워 담았다. 사람과 사랑과 삶을 쫀쫀하게 엮어감에 있어 만남의 필연적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되면서 내가 만나온 이들의 얼굴들이 전두엽을 바쁘게 했다.


   

 번번이 그랬다. 이사를 할 때마다 거짓말처럼 그랬다. 여건과 형편에 맞춰 산자락을 찾아다니며 집을 구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싶지만 그럴 때마다 여건과 형편이 달갑지 않았다. 인터넷 설치가 어려운 장소라 전봇대를 세워야 한다거나 정화조가 말썽이라 환풍기 교체 작업을 해야 한다거나 지하수의 수력이 약해 애를 먹는다거나 수도 배관이 얼어 보일러 가동이 멈춘다거나 우리 순돌이의 우렁찬 짖음에 동네의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거나... 돌아보니 수월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게는 순조로워야 할 문제들이 아닌가. 이런 걸 두고 첩첩산중이라고 하나 보다. 일주일 만에 TV를 보게 되는 웃지 못할 일을 겪고 보니 못 보는 것과 안 보는 것의 차이만 크게 부각되었다.


 버거웠던 삶의 틈새로 드나들었던 수많은 이들과의 만남과 이별은 그다지도 묵묵하기만 했을까. 때로는 피하고 싶었던 만남으로 인해 멀어지는 지름길을 무슨 수로 변명하였을까.


그래!! 사랑이 아니었다면 어떡하였으리.    

 

 우리 순돌이와의 만남, 힘들고 아픈 순간순간들의 시간 위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사람들과의 만남, 그와의 만남, 결단코 쓰러질 수 없는 스스로와의 만남, 그리고 나의 절대자 그분과의 만남. 이렇듯 내 주위를 배회하는 수많은 만남들이  분명 사랑이었을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는 끝끝내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몰라서 좋다.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언어의 온도가 삶으로 겹겹이 쌓인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는 싶어 진다. 쌓였다는 게 꼭 오랜 세월을 대변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쌓임이 때로는 짧은 시간에도 오랜 세월만큼의 쌓임이 될 수 있는 게 사람과의 사랑이고 삶이었다.        






고요가 적막하다고 만은 할 수 없는 깊은 밤이다.

커튼 없는 창의 비밀을 알게 되니 속이 소란스러워진다. 마땅히 뒤에 있어야 할 책장과 옷장이며 정리 들 된 잡동사니들이 돌아보지 않아도 앞에서 보인다. 시커먼 어둠이 배경이 되니 절로 비치는 거울이 되는구나. 다시 고개를 들어 시선이 고정된 곳은 내 방에 설치된 에어컨이다. 아들 같은 조카 녀석이 거실과 방에 에어컨을 설치해 주었다. 얼마나 사려 깊고 정중한 놈인지 에어컨 냉기가 독이 되었던 고모부에게 여러 번 사 드려도 되겠느냐고 여쭤본 다음에 결정했다는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방 에어컨이 따로 있으니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도 있었으나 혼자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은 고모를 말없이 헤아렸고, 이제는 괜찮으리라는 상황 판단에 고모부의 의사를 먼저 묻고 허락받는 조카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기특한지 아들처럼 내게로 와준 것이 감사했다.    



우리 순돌이의 사랑과 나와 남편 사이에 아들처럼 존재하고 있는 조카에 대한 사랑.

양손이 가득할 때보다 양손이 비었을 때 만났던 사람들과의 진 사랑.

그분과 점점 돈독해지는 숨 깊은 사랑.    



사랑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걸 핑계로 계속 사랑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의 기쁨을 깨달아가는 삶이라면 사람과 사랑이 늘 내 곁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깊어가는 가을이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니 이곳에서 멋지게 가을을 낙엽처럼 쓰고 싶다.    


이 밤이여 안녕!!

매거진의 이전글 월간 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