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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프 힐 링 Jul 07. 2021

멸치국수

사천 원짜리 국수의 맛

 연일 이어지는 장맛비에 빨래만 눅눅한 게 아니다. 감각도 눅눅해졌나 보다.

시계가 아니면 어쩔 뻔했을까.

때를 놓친 주부는 늦은 점심 준비를 위해 날쌘 마음으로 주방을 향한다.


무슨 반찬을 해 먹을까?


밥솥을 열어보니 밥은커녕 씻은 듯이 깨끗한 빈 밥통만 덩그러니 있었다.

아침밥을 퍼내고 '이어 을 올려야겠구나'를 여러 번 생각했지만 먹고 치우는 사이 까먹어 버린 것이다.

예전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아련한 생각이 떠오른다.

나를 부를 때 엄마는 00아, 00야, 00아, 그다음이 내 이름이었다.

나는 그게 불만이었다. 도대체 엄마한테 나는 항상 네 번째란 말이야? 집에도 없는 오빠 언니들을 꼭 불러야만 뒤따라 오는 내 이름. 나는 알면서도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부르는 것인 줄 알면서도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못 들은 척했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엄마는


" 에구에구... 어째 이럴까나 또 쯧쯧..."


엄마의 자책 속에 '네 번째라서가 아니냐'라는 의도를 읽어면서도 무슨 심통이었을까?

엄마 나이가 되고 보니 엄마가 이해되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팽팽한 대립이 무너졌기  때문이며,  단단했던 자아 긴 세월에 닳아 무뎌졌기 때문임을 돌아가시고서야  알게 되었다. 멀리 있는 자식들도 부모는 항상 데리고 산다는 것을 그때 가 무슨 수로 알았겠는가.


그것도 엄마와 닮았다. 이제 보니 닮은 것이 많은 모녀였다. 얼굴도 키도 생각도 닮았다.

이제 의식의 모퉁이에라도 동여매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잊지 않는다. 






'할 수없이 국수!!  

흐린 날은 멸치국수가 최고지'


동네를 벗어나 양수리(양평 양서면에 있는 곳)를 나가면 사천 원짜리 멸치국수를 파는 곳이 있다.

반찬이 마땅찮을 땐 갑자기 멸치국수가 먹고 싶다고 남편을 졸라 한 끼 해결의 묘미를 느끼고 온다.

졸깃한 면발과 비릿한 멸치 냄새를 좋아하는 남편은 고기보다 사실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면 종류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탄수화물의 주범인 면 종류는 우리 식탁의 금기 식품 중 하나여서 먹고 싶어도 참아야 했다.

이제 간간히 면이 주는 포만감과 맛깔스럽게 감치는 뒷맛을 만끽하고 있다.

그 맛을 흉내 내는 것이다.

아직도 주방이 익숙지 않는 나는 특히 육수를 내는 것을 가장 어려워한다.

맛을 책임지는 반이 육수라는 말은 누차 들어왔어나 귀찮은 날은 수돗물을 콸콸 받아 요리를 한다.

그러니 대부분 맛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오늘은 맘먹고 육수부터 천천히...

들은풍월은 있어 양파 껍질과 대파 뿌리를 깨끗이 손질해서 냄비에 담는다.

육수 멸치 한 움큼과 디포리 서너 마리랑 냉장고에 굴러 다니는 무 한 토막을 같이 담고 한동안 끌이기 시작한다.  냄비의 물이 반으로 줄어들 때쯤 불을 끄고 육수의 맛을 보았다.

물맛이 아니라는 것. 그것 외는 들인 정성이 아까울 만큼 밍밍했다. '육수 맛이 왜 이래?' 불길한 예감이 돌았다. 어쨌든 오이와 당근을 채 썰어 접시에 담고 애호박과 양파도 볶아 놓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양념장도 당연히.

쫄깃쫄깃한 면발을 연거푸 후루룩 거리며 한 주먹씩 잡히는 대로 소쿠리에 건져 놓았다.



그리고 한 참이 지났다.

기다리다 지친 남편이 주방 엘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


"들기름 병... 짜지는 거야?"

"유리병을 어떻게 짜! 나원 참..."

"그럼 그거 들고 뭐 해?"

"뭘?"
"그 유리병 말이야 들기름 병 아냐?"

"... 엥???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들기름병을 거꾸로 세워놓고 한참을 짜고 있는 게 아닌가 헐~~~.

얼마나 힘주었는지 내려놓고 보니 새끼손가락을 뺀 나머지 여덟 손가락 첫마디가 얼얼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푸 하 하 하 하.... 당연 웃어야지^^^)


무슨 생각에 붙들려 그 짓을 했는지 기억조차 없다.

유리병을 물구나무 세운채 손가락이 아프도록 짜면서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걷어놓은 빨래를 다시 널면서 왔다 갔다 하시던 엄마가 또 생각났다.


엄마와 나는 어디를 가고 있었을까?


그렇게 날은 또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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