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 워리어의 르상티망

엔터키 뒤의 노예들

by 하노이별

1. 반지하의 밤, 오징어와 캔맥주

퇴근 후 삐걱거리는 도어락을 열면, 창문 없는 현관에서부터 서울 변두리 다세대 주택 반지하 특유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훅 끼쳐온다. 내년이면 서른. 내 인생의 견적은 이 축축한 방구석만큼이나 답답하고 초라하다.

지방의 이름 모를 지잡대 졸업이라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미는 애매한 꼬리표. 서울로 상경해 이력서를 수십 군데 밀어 넣은 끝에 겨우 엉덩이를 들이민 곳은 어느 중견기업의 '계약직' 자리였다. 최저임금을 갓 넘기는 월급 명세서를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지만, 나는 내색할 수 없다. 커피 심부름부터 팀장의 썰렁한 아재 개그에 영혼까지 끌어모아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이유는 단 하나, '정규직 전환'이라는 그 알량한 희망 고문 때문이다.

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평범하다 못해 볼품이 없다. 스트레스를 밤마다 야식으로 풀다 보니 어느새 퉁퉁하게 살이 오른 몸, 화장기 없는 못생긴 얼굴, 든든한 부모의 배경도 없다. 주말에 만나 하소연할 남자친구는커녕, 당장 다음 달 카드값과 반년 뒤 계약 만료의 공포가 내 목을 서서히 조여 오고 있다.

현실의 나는 언제 잘릴지 몰라 회식 자리에서 고기를 굽고 고개를 조아리는 철저한 '을'이다. 하지만 이 푸르스름한 컴퓨터 모니터 불빛 앞에서는 다르다. 샤워를 대충 마치고 냉장고에서 편의점 네 캔 만 원짜리 맥주 두 캔을 꺼낸다. 가스레인지 불에 마른오징어 한 마리를 대충 구워 질겅질겅 씹으며 포털 사이트 연예·스포츠 기사 댓글창을 연다. 이곳에서 나는 가장 날카롭고 공정한 '심판관'이 된다. 나의 갑질이 시작된다.


2.100억짜리 금메달과 독립투사들

요 며칠, 내 속을 가장 뒤틀리게 만든 건 밀라노의 눈신(雪神)이라 불리는 가은이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세 번의 허리 수술을 이겨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그 아이. 온 나라가 그녀의 '인간 승리'에 열광하며 축하할 때, 나는 TV 속 그 아이의 환한 웃음이 왠지 보기가 싫었다.

나보다 한참 어린애가 세상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 것도 짜증 났고, 대기업의 빵빵한 지원을 받으며 훈련했다는 사실은 더 재수 없었다. 나는 썩은 동아줄 하나 잡겠다고 매일 팀장 비위를 맞추며 똥줄을 태우는데, 저 계집애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설상 위를 날아다닌다니.

그러던 어제, 속이 뻥 뚫리는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

'인간 승리 K양, 알고 보니 강남구 100억대 아파트 거주? L그룹 후원금 논란.'

강남의 초고급 아파트 외벽에 내걸린 그녀의 금메달 축하 현수막 사진이 폭로된 것이다. 나는 맥주를 들이켜며 쾌재를 불렀다.

"그럼 그렇지. 흙수저 인간 승리는 개뿔. 결국 돈 많은 부모 덕분에 온실 속 화초처럼 편하게 금메달 딴 거였네."

내 안의 알 수 없던 열등감과 찌질함이, 순식간에 '불의를 향한 정의로운 분노'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기름 묻은 손을 옷에 대충 닦고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100억짜리 집에 살면서 후원금은 왜 날름 받아먹냐? 진짜 절박하고 가난한 유망주들 기회까지 뺏어간 뼛속까지 이기적인 금수저년. 메달 반납해라. 토 나온다.]

'엔터(Enter)' 키를 경쾌하게 내리쳤다. 타닥, 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순간만큼은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도, 빈손으로 서른으로 떠밀려가는 벼랑 끝의 절박함도 모두 사라졌다. 내가 마치 거대한 기득권에 맞서 일침을 가하는 투사가 된 것 같았다.

새로고침을 누를 때마다 내 댓글에 '좋아요'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속 시원한 사이다 댓글이네요."

"이게 맞지. 돈으로 금메달 샀네."

나와 같은 익명의 동지들이 내 댓글에 동조하며 가은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가 이 사회의 거대한 불의에 맞서 싸우는 독립투사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나는 오징어 다리를 질근거리며 모니터 너머로 오만한 금수저의 목을 뎅강 베어버리는 짜릿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3. 살인자가 된 손가락

오늘도 퇴근 후 습관처럼 모니터 앞에 앉았다. 어제 가은 기사에 달아둔 내 댓글의 '좋아요'가 몇 개나 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베스트 댓글 1위에 당당히 걸려 있는 내 아이디를 보며 입꼬리가 씰룩거리던 참이었다.

화면 우측 하단에 시뻘건 '속보' 창이 떴다.

[단독] 유명 연예인 S,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 "악플에 시달려 극단적 선택"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캔맥주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하얀 거품이 장판을 적시며 흘러내렸지만 닦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연예인 S. 불과 사흘 전이었다. 그녀가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무명 시절의 설움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 나는 그 기사에도 어김없이 엔터키를 눌렀었다.

[관종년, 또 감성팔이 시작이네. 얼굴 다 뜯어고치고 나와서 우는 척하면 누가 속아주냐? 보기 역겨우니까 징징대지 말고 그냥 은퇴나 해라.]

손끝이 덜덜 떨렸다. 화면 속 S의 흑백 영정 사진이 마치 모니터를 뚫고 나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바란 건 결코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야, 나 하나 때문에 그런 건 아닐 거야. 수만 개의 악플 중 하나였을 뿐이잖아. 연예인이면 그 정도 멘탈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다들 욕하는데 왜 나만 죄책감을 가져야 해?'

머릿속으로는 미친 듯이 변명과 합리화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저 내 비루한 현실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한 장난, 가벼운 취미, 돈 안 드는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그저 키보드를 두드렸을 뿐이다. 내가 칼을 들고 찾아간 것도 아니고, 그냥 글자 몇 개 적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치며 스스로를 속이려 해도 소용없었다. 기사에는 그녀가 수십 알의 수면제를 털어 넣었다고 적혀 있었다. 내가 무심코 던진 그 악플 한 줄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삼켰을 그 수면제 한 알이 된 것만 같은 끔찍한 기분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곰팡이 냄새나는 반지하 방 안에서,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짐승처럼 헐떡였다. 모니터 속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악플들이, 이제는 소름 끼치는 살인마들의 웃음소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4. 거울 속의 노예

철학자 니체는 말했다. 강자를 이길 힘이 없는 약자들은, 현실을 바꿀 용기를 내는 대신 타인을 도덕적으로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을 위로한다고. 그것이 시기심에 찌든 노예들의 병든 도덕, '르상티망'이라고 했다.

정확했다. 나는 노예였다.

내 인생을 바꿀 용기도, 능력을 키울 독기도 없는 비겁한 겁쟁이. 내가 가지지 못한 부와 재능, 그 눈부신 성취가 부러워서 미칠 것 같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뚱뚱하고 못생긴 내 초라한 바닥이 드러날까 봐 타인을 헐뜯는 데 내 온 에너지를 쏟아부은 찌질한 패배자.

가은 선수가 15살에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참아내며 눈밭 위를 구를 때, 나는 무엇을 했나. 정규직이 되기 위해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내 삶이 고달프다고 징징대면서, 정작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은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연예인 S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그 화려한 조명 아래 서기 위해, 10년이 넘는 기나긴 무명 시절 동안 수백 번의 오디션에서 떨어지며 삼켰을 눈물을 나는 모른다. 스폰서니 성형이니 온갖 더러운 조롱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아 버텨낸 그 지독한 생명력을, 나는 그저 '관종'이라는 단어 하나로 짓밟았다.

그들이 자신의 한계와 싸우며 피 흘리고 있을 때, 나는 안전한 방구석에 숨어 타인의 피땀을 깎아내리며 비열한 위안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방바닥에 말라붙은 맥주 얼룩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꺼진 모니터의 시커먼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푸석푸석한 피부, 퀭한 눈, 헝클어진 머리.

그곳에는 세상을 향해 호통치던 투사, 정의로운 심판자는 온데간데없고, 언제 정규직에서 미끄러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겁먹은 스물아홉 살의 늘어진 추리닝을 입고 있는 계약직 여직원이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가은의 100억짜리 아파트를 욕하고, 연예인 S의 눈물을 조롱하며 엔터키를 내리쳤던 그 수많은 밤들. 그 짓을 한다고 해서 내 월급이 만 원이라도 올랐던가? 나를 벌레 보듯 하던 정규직 대리의 태도가 변했던가? 나의 이 끔찍한 반지하 방에 볕이 한 뼘이라도 들었던가?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타인을 진흙탕으로 끌어내려 발로 짓밟는 상상 속에서, 나는 잠시나마 내가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역겨운 착각에 빠졌을 뿐이다. 내가 엔터키로 내리친 단두대의 칼날은 결국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해 있었다. 남을 깎아내리는 쾌감이라는 독약을 마시며, 내 삶을 일으켜 세울 진짜 생명력을 스스로 말려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5. 플러그를 뽑고, 서늘하게 물러서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의 불을 켰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마른오징어 다리와 빈 맥주 캔들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내 유일한 도피처였던 컴퓨터의 전원 플러그를 벽에서 확 뽑아버렸다.

단순히 죄책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타인의 삶을 관음적으로 훔쳐보며 끈적하게 달라붙어 질투하고 평가하는 저 싸구려 군중들로부터, 그리고 그 무리 속에서 가장 비열하게 자판을 두드리던 나 자신으로부터 철저하게 떨어져야 했다. 남의 가십과 불행에 기대어 연명하던 병든 시선을 거두고, 나만의 공간으로 서늘하게 물러서는 것. 그것이 익명의 무리에서 벗어나 비루한 내 삶을 구원할 첫걸음이었다.

모니터가 완전히 꺼지자, 좁고 초라한 내 반지하 방의 민낯이 환하게 드러났다.

내일 아침이면 나는 또다시 만원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계약 연장을 구걸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도망치지 않겠다. 남의 금메달에 침을 뱉고 남의 눈물을 조롱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1밀리미터라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뼛속 깊이 깨달았으니까. 타인을 질투하고 저주하는 늪에서 허우적대는 한, 나는 영원히 이 곰팡이 나는 반지하 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나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수시로 들락거리며 악플을 달고 낄낄대던 연예 기사 포털 앱과 커뮤니티 앱을 모조리 삭제했다. 그리고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먼지 쌓인 토익 책과 직무 자격증 수험서를 책상 위로 꺼냈다.


6. 아모르 파티 : 시궁창 속 나만의 빙판

당장 내일 출근하면, 계약직 꼬리표를 떼기 위해 상사의 썰렁한 농담에 억지웃음을 파는 짓부터 그만둘 것이다. 대신 점심시간에 텅 빈 회의실에 들어가 그동안 덮어두었던 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창을 띄울 것이다. 이 회사가 아니면 죽을 것처럼 굽실대는 대신, 비루한 내 스펙을 한 줄이라도 채워 넣어 당당하게 이직할 준비를 시작하겠다. 이번 주말에는 누워서 남의 가십이나 읽는 대신, 미루고 미뤘던 자격증 시험을 접수하고 도서관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방구석에 주저앉아 남을 깎아내리며 키보드나 두드리던 이 퉁퉁한 몸뚱이를 이끌고 동네 헬스장부터 끊을 것이다. 타인의 피땀을 질투하며 악플을 쏟아내는 대신, 이제는 쇳덩이를 들고 러닝머신 위를 뛰며 오직 나를 위한 진짜 땀방울을 뚝뚝 흘려보겠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누군가는 100억짜리 아파트에서 태어나 금메달을 따고, 누군가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하지만 그 탁월함 뒤에는 내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들만의 고독하고 처절한 투쟁이 있었음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서 있는 곳은 화려한 올림픽 경기장이 아니다. 곰팡이 냄새가 나고, 자칫하면 미끄러져 벼랑 끝으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태롭고 비루한 계약직의 빙판이다.

하지만 이곳이 내 운명이고, 내가 개척해야 할 유일한 영토다.

니체는 우리에게 노예의 쇠사슬을 끊고 초인이 되라고 했다. 초인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만화 영화 속의 전지전능한 슈퍼맨이 아니다. 초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낡은 껍질을 깨부수고, 어제의 나를 넘어서며 스스로 삶의 가치를 창조해 내는 '자기초극'의 화신이다.

내 몫으로 주어진 이 시궁창 같은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변명하지 않고, 오늘 내가 외워야 할 영단어 한 개, 오늘 내가 고쳐 써야 할 이력서 한 줄을 묵묵히 채워나가는 사람. 그것이 바로 내 삶에서 실천하는 초인의 실체다.

자기초극이란 거창한 혁명이 아니다. 남의 인생을 품평하며 낭비했던 시간을 회수해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비루한 업무를 완벽하게 해내고, 텅 빈 통장 잔고 앞에서도 비굴해지지 않으며, 가기 싫은 헬스장으로 향하기 위해 따뜻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기어이 책상 앞에 앉는 그 지독한 자기 통제의 과정이다.

키보드 뒤에 숨어 타인을 저주하던 두툼한 손을 펴서 펜을 쥐었다. 비록 무릎이 깨지고 초라하게 밀려날지언정, 이제는 남을 끌어내리는 대신 내 삶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고 나만의 빙판을 딛고 나아갈 것이다.

엔터키 뒤에 숨어있던 비겁한 노예는, 오늘 이 반지하 방에서 완전히 죽었다. 남의 인생에 함부로 '엔터'를 치던 손가락을 거두어, 이제는 매일 어제의 나를 허물고 다시 세우며 이 비루한 현실을 재료 삼아 단단한 내 삶을 직접 조각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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