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함께 돌린 문고리
1. 국회의원 감, 그리고 몰락의 전주곡
새벽 5시. 세상이 고요한 이 시간, 우리 집은 가장 처절한 소리로 깨어난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낮은 읊조림과 바닥에 몸을 누이는 둔탁한 소리. 4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를 위해 108배를 올리는 어머니의 기도 소리다. 나는 저녁 9시에 일어나 밤새 게임과 웹툰으로 현실을 마비시키다 이 소리를 마주한다.
나의 시간은 12년 전,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 멈춰 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전교 1등을 놓쳐본 적 없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국회의원 감"이라며 추켜세웠다. 그 시절의 나는 거만했다. 조회 시간마다 전교생 앞에서 상장을 받을 때면, 나를 우러러보는 시선이 당연한 공기처럼 느껴졌다.
쉬는 시간에도 문제집을 펼칠 필요가 없었다.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 모든 지식이 내 머릿속에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던 시절, 나는 내가 특별한 인종이라 믿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집안의 보석처럼 모셨고, 소도시의 좁은 길을 걸을 때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세상은 나를 위해 준비된 무대였고, 실패란 단어는 나와 다른 차원의 저열한 명사일 뿐이었다.
하지만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사립고에 던져진 순간, 그 견고하던 성채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중간 대열의 꼬리에 겨우 매달린 성적표는 죽음보다 참혹했다.
결정적인 순간은 고1 기말고사, 눅눅한 습기가 교실을 가득 채운 오후 3교시 영어 시험 시간이었다.
교실 안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질식할 것 같았고, OMR 카드 위에 떨어지는 컴퓨터 사인펜 소리조차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1분 1초가 내 인생의 성패를 가를 것 같던 그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오른쪽 사선 맞은편 놈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미세한 진동이었다. 하지만 곧 책상 모서리가 떨리고 바닥을 타고 그 리듬이 내 발끝으로 전달되었다.
'탁, 탁, 탁, 탁...'
그 일정한 박자가 내 예민해진 신경줄을 톱질하기 시작했다. 문제 속의 영어 단어는 흩어졌고, 머릿속엔 오로지 그놈의 허벅지가 만들어내는 기괴한 진동뿐이었다.
사실은 평범함으로 추락하는 나의 무능을 인정하기 싫어, 내 정신이 가장 완벽한 '조작된 알리바이'를 찾아낸 것이다.
'이 문제를 내가 못 푸는 게 아니야, 저 미친 진동 때문에 내 뇌가 멈춘 거야.'
나는 속으로 그놈을 수천 번 죽였다. 그놈의 다리만 멈춘다면 내 인생이 다시 1등으로 복귀할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시험지는 눈물과 땀으로 번져갔고, 나는 결국 펜을 놓았다.
그것은 단순한 시험 포기가 아니었다. 전교 1등이라는 찬란한 왕관을 스스로 짓밟고, 수재라는 성에서 쫓겨나 평범함을 넘어 낙오자라는 나락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항복 선언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빛나는 별이 아니라, 그저 소음에 무너지는 한낱 나약한 학생일 뿐임을 인정해야 하는 그 순간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나는 그놈의 다리 떠는 소리에 내 모든 신경과 모든 증오를 쏟아부으며 무너져 내렸다.
결국 나의 강박은 과락과 학교의 경고로 이어졌다. 부모님은 3학년 올라가는 겨울 방학이 되어서야 내 상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나를 신경정신과로 데려가셨다.
정신과 의사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강박장애로 인해 현재 정상적인 학업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선고를 내렸다. '국회의원 감'이 '정신질환자'로 공식화되던 순간이었다.
나는 그 진단서를 무기 삼아 3학년 1학기에 자퇴서를 던지고 학교를 떠났다. 검정고시를 거쳐 수도권의 이름 없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내 오만한 자존심은 그곳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 학기 만에 대학을 때려치우고 행정고시에 매달렸다. 고시 패스만이 내 실력을 증명할 유일한 탈출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과 스터디 카페를 오가는 길 위에서도 그놈의 다리 떠는 환영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고, 나는 결국 내 방이라는 거대한 감옥 안으로 스스로를 걸어 들어갔다.
2. 도망자의 방 : 반복되는 퇴각과 거대한 문고리
방 안에서의 6년은 비겁한 안식의 연속이었다.
물론 나라고 해서 이 곰팡이 핀 시간 속에 영원히 침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가끔은 이 지긋지긋한 무기력을 청산하려 방문 고리에 힘을 주곤 했다. '국회의원 감'이라던 과거의 허명을 잠시 접어두고, 편의점 면접을 보러 가거나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하려 애쓰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 밖으로 한 걸음만 내디디면, 내 예민해진 신경은 가시 돋친 짐승처럼 날을 세웠다.
한번은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술에 취한 중년 남성이 담배 이름을 잘못 알아들었다며 내 면전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이, 젊은 친구.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 공부 못 해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그 찰나의 모욕은 단순한 불쾌함으로 끝나지 않았다. 남자의 고함 소리는 이내 귓가에서 기괴한 진동으로 변했다. 마치 고1 기말고사 날, 사선 맞은편에서 들려오던 그놈의 다리 떠는 소리처럼.
'그래,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그놈이 내 인생을 망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할 리가 없는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내 안의 방어기제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17살의 그 교실로 강제 소환한다. 현실의 문제를 유연하게 넘기지 못하고, 나는 다시 억울한 수재의 자리로 도망친다.
'내가 무능한 게 아니라, 저놈 때문에 내 집중력이 망가진 거야'라는 남 탓의 마약. 그 비겁한 합리화 뒤에 숨어 방문을 걸어 잠그면 찰나의 안도감이 찾아왔다. 놈을 저주할 때만큼은 내가 실패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될 수 있었으니까.
방 안에서의 일상은 신경질적인 강박의 연속이었다.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다가도 층간소음이나 냉장고 소리조차 그날의 진동처럼 느껴져 마우스를 집어던지곤 했다.
어느덧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 방문 밖 어머니의 108배 소리는 이제 기도를 넘어 나를 향한 무언의 통곡처럼 들린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가쁜 숨소리와 둔탁한 마찰음은, 방문 안의 나에게는 채찍질과 같았다. "너는 다시 빛날 수 있다"는 그 간절한 염원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이 방 안에 더 깊숙이 유폐시켰다.
내가 무너질 때마다 더 길어지는 어머니의 기도는 내가 갚을 수 없는 거대한 부채가 되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어머니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나의 비겁함은 더 끔찍하게 다가왔고, 차라리 죽고 싶었다. 나는 그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더욱 광적으로 남 탓에 매달렸다.
나는 언제까지 그날의 교실에 갇혀 있을 것인가. 나를 지켜주는 유일한 알리바이였던 그 원한을 버리고, 이 벌거벗은 무능함을 직면할 용기가 과연 내게 있는걸까.
지금 내 앞에는 행정고시보다 더 거대하고 무거운 방문이 놓여 있다. 6년 동안 굳어버린 이 문고리를 돌리기 위해, 나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 필요함을 직감한다.
그놈을 욕하는 데 써버린 에너지를 나를 일으키는 데 쓸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질문 앞에 서 있다.
3. 원한의 사슬을 끊는 법 : 내 안의 ‘힘에의 의지’를 깨우다
니체는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며 그 증오심으로 연명하는 마음을 '르상티망(Ressentiment)', 즉 원한이라 불렀다.
지난 6년 동안 나의 방을 지탱해온 가장 큰 기둥은 바로 이 원한이었다. "그 다리 떨던 놈만 아니었어도"라는 말은 나를 피해자로 격상시켰고,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 원한은 결국 나 자신을 갉아먹는 독이었다. 남을 탓하는 동안 정작 내 인생의 주인 자리는 공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토록 그놈을 미워해야만 했을까. 이제야 솔직해져 본다. 나는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그를 미워함으로써 나의 무능을 가려야만 했다. 그가 내 인생의 파괴자가 되어주어야만, 내가 1등의 성에서 쫓겨난 이유가 나의 나약함이 아닌 외부의 불운이 될 수 있었으니까.
이 비겁한 안주를 깨부수기 위해 내가 소환한 것이 바로 니체의 '힘에의 의지'였다.
여기서의 힘은 타인을 굴복시키는 폭력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고통과 한계를 딛고 일어서려는 생명 본연의 창조적 에너지다. 특히 그 핵심에 있는 '자기초극(Selbstüberwindung)'은 어제의 나를 부수고 더 높은 단계의 나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즉, 환경에 반응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명령하고 그 명령에 엄격히 복종함으로써 스스로를 새롭게 빚어내는 주권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동안의 나는 외부의 자극에 휘둘리는 '반작용'의 노예였다. 하지만 자기초극의 힘을 깨우는 순간, 나는 비로소 그놈에게 내어주었던 내 인생의 핸들을 되찾아온다.
자기초극이란 그놈을 용서하는 성인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놈을 탓하며 멈춰 서 있던 나 자신의 나약함을 발판 삼아, 그 상처 위로 한 걸음 더 내딛는 ‘능동적인 결단’이다.
물론 이 '내면의 근육'은 단숨에 생겨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 퇴화한 다리 근육을 다시 세우는 재활 훈련처럼 고통스러웠다. 남을 탓하고 싶을 때마다 혀끝을 깨물며 그 비겁한 쾌락을 참아내는 것 자체가 처절한 수행이었다.
나의 자기초극은 거창한 혁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의 에너지를 외부가 아닌 내부로 돌리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나는 책상 위에 쌓인 6년이 지난 낡은 행정고시 서적들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내 실력을 입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무너진 자존심을 가리기 위해 세워둔 화려한 병풍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먼지 쌓인 책들을 쓰레기봉투에 처박는 순간, 손바닥에 전해지는 묵직한 하중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첫 번째 물리적 감각이었다.
다음으로 나는 '규칙'을 세웠다. 낮과 밤이 뒤바뀐 채 게임 속으로 도망치던 습관을 끊고, 정해진 시간에 세수를 하고 환기창을 여는 것.
그놈의 다리 떠는 진동이 환청처럼 들려와 다시 이불 속으로 숨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직접 소리쳤다.
"그를 미워하는 데 내 생명력을 낭비하지 않겠다. 일어나라, 그리고 움직여라!"
뇌의 명령에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그 찰나의 순간들이 쌓여, 6년 동안 마비되었던 나의 주체성이 조금씩 박동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나는 방 밖으로 나갈 '내면의 근육'을 갖추게 된 것이다.
4. 아모르 파티 : 새벽의 문을 열며
방 안의 공기를 바꾸는 것은 문고리를 돌리는 찰나의 악력이었지만, 그 문 너머로 발을 내딛게 한 것은 내 삶 전체를 긍정하겠다는 결단이었다.
나는 쓰레기봉투에 담긴 낡은 고시 서적들을 현관 앞에 내놓았다. 그것은 더 이상 내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내가 거쳐 온 치열했던 방황의 흔적일 뿐이었다.
나는 '행정고시 합격'이라는 거창한 미래의 보상 대신, '오늘 아침 어머니와 마주 앉아 밥 한 끼 먹기'라는 지극히 평범한 오늘의 초극을 선택했다.
문을 열기 전, 나는 거울 속에 비친 초라한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여전히 눈가는 휑하고 피부는 거칠었지만, 그 안에는 이전에는 없던 단단한 빛이 서려 있었다.
니체는 말했다. "너를 파괴하지 못하는 고통은 너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고. 6년의 고립은 나를 파괴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는 인간의 바닥을 확인하고 다시 일어설 힘을 기르게 한 연단(鍊鍛)의 시간이었다.
방문을 열자, 차가운 새벽 공기와 함께 향냄새 섞인 어머니의 땀 냄새가 훅 끼쳐왔다. 마지막 108번째 절을 마치고 부처님의 자비를 간절히 빌며 바닥에 엎드려 계신 어머니의 가냘픈 등.
한때는 그 등이 나를 비난하는 채찍처럼 느껴져 외면했지만, 이제는 그 굽은 선에서 삶을 지탱해온 숭고한 생명력을 읽는다. 나는 그 등 위로, 그리고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나의 과거 위로 처음으로 긍정의 발을 내디뎠다.
이제 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선언한다.
이것은 내게 닥친 불행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체념이 아니다. 내가 겪은 모든 고통과 치욕, 그리고 방황의 시간조차 긍정해 내는 적극적인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나의 눈부셨던 수재 시절뿐만 아니라, 강박에 무너졌던 비참함, 남을 탓하며 허송세월했던 6년의 히키코모리 생활까지도 내 소중한 삶의 필수적인 한 조각으로 사랑하기로 했다.
내 삶에 일어난 모든 일은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기 위한 최선의 사건들이었다. 아모르 파티는 고통이 없는 삶을 구걸하는 유약함이 아니다. 어떤 고통이 폭풍처럼 몰아쳐도 그것을 내 삶의 아름다운 무늬로 받아들이고, 그 비극의 한복판에서 기꺼이 함께 춤추겠다는 강인한 긍정의 의지다.
나는 이제 누군가 다리를 떤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무시한다고 해서 다시 방으로 도망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모든 외부의 자극은 내가 초극해야 할 대상일 뿐, 내 존재를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과거의 나를 죽이고 다시 태어난다. 거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기도 소리가 멈췄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던 어머니가,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머니의 눈동자가 잠시 미세하게 떨렸으나, 어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4년 전 그 스님이 일러준 참회의 시간을 마친 수행자처럼, 평온하게 미소 지으며 부엌으로 향하셨다.
잠시 후,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과 된장찌개가 차려졌다.
어머니와 나는 6년 만에 방이 아닌 식탁에 마주 앉았다.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 창밖에서 들려오는 아침 새소리, 그리고 어머니의 규칙적인 숨소리.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그 어떤 소음보다도 선명하고 아름다운 삶의 리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