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괴물이 너를 쫓을 때

집착의 궤도를 벗어나 각자의 별이 되는 니체의 이별법

by 하노이별

1. 강남의 요새, 그 앞의 배달부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나니 비로소 용기가 났다. 아니, 그것은 용기라기보다 내 안의 열등감이 만들어낸 비릿한 살의(殺意)이자, 나를 벌레 취급한 세상을 향해 휘두르는 절망적인 비명이었다.

나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압구정의 고급 아파트 복도 계단참에 웅크리고 앉았다. 무릎 위에는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박스였지만, 그 안에는 그녀에게 어울릴 명품 스카프와 향수가 아니라 철물점에서 산 둔탁한 몽키스패너와 칼, 가위 그리고 청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나는 오늘 밤, 사원증 대신 흉기를 든 택배 기사가 되기로 했다.


"택배 왔습니다."

그 한마디면 의심 없이 문이 열릴 것이다. 내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나를 벌레 보듯 했던 그녀의 부모를 제압하고, 내 사랑을 거부한 그녀를 무릎 꿇려 울면서 빌게 만들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전도유망한 명문대생'이자 '대기업 엘리트 사원'인 나를 이 지경까지 몰고 왔는가. 내 머릿속에서 며칠 전의 기억이 사이렌처럼 울려 퍼졌다.


"아드님 좀 말려주세요. 우리 애가 무서워서 밖을 못 나갑니다."


며칠 전, 그녀의 부모가 내 본가인 지방의 허름한 주택까지 찾아와 내 부모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건넨 말이었다. 그들의 태도는 정중했고,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예의 바름이 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평생 흙바닥에서 농사만 지은 낡은 러닝셔츠 바람의 내 아버지는, 그 고급 외제차에서 내린 부부 앞에서 죄인처럼 굽실거렸다. 그 장면을 목격했을 때, 내 안의 뇌관이 터졌다.

그들의 정중한 부탁은 내 귀에 부탁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격(格)이 다른 집안'이 내리는 우아하고도 모멸적인 경고였다. "네 주제를 알라"는 환청이 들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코피를 쏟으며 공부해 얻어낸 명문대 졸업장과 대기업 사원증, 그리고 내 빈약한 뿌리를 감추려 활자째 씹어 삼키듯 읽어댔던 수많은 철학 책들까지. 그 모든 지적 허영과 치열한 노력도 저들의 우아한 폭력 앞에서는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나는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완벽한 가해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감히 나를, 나의 노력을 무시한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보여주겠다는 뒤틀린 인정 욕구가 나를 이 차가운 복도까지 끌고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밑바닥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독한 소유욕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너는 내가 죽을힘을 다해 쟁취한 전리품이자, 내 비루한 출신을 덮어주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그런 네가 나를 버려? 감히 다른 놈 앞에서 웃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산산조각 내서라도 영원히 내 발밑에 두어야 했다. 그것만이 내가 너를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으니까.

401호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지나치게 하얘서, 때가 찌든 내 낡은 운동화와 초라한 밑바닥을 가차 없이 들춰내는 것 같았다. 그 우아한 평온함이 나의 비참함을 더욱 부채질했다.


2. 잃어버린 봄날 : 너는 나의 구원이었다가, 족쇄가 되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에 놀라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옆집 남자가 내리고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안도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현관문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배달원 흉내를 내기 위해 조끼까지 챙겨 입은 내 모습이 비쳤다.

거울 속의 그놈은 낯설고도 끔찍했다. 광화문 빌딩 숲을 누비던 엘리트 사원은 온데간데없었다. 술기운에 붉게 충혈된 눈, 입가에 하얗게 맺힌 거품, 그리고 흉기가 든 상자를 마치 뺏기면 안 되는 보물단지처럼 소중하게 껴안고 있는 모습.

그것은 지성인이 아니었다. 그저 상실감에 미쳐 날뛰는, 이성을 잃은 짐승 한 마리였다.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진 걸까. 처음부터 계산적이었던 건 아니다. 맹세코, 내 사랑의 시작은 순수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대학 도서관, 그녀는 찌든 땀 냄새와 곰팡내 나는 반지하의 습기를 달고 살던 내게 불어온 '봄날의 꽃향기'였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버느라 늘 날카롭게 날이 서 있던 나에게, 구김살 없이 해맑게 웃으며 "선배, 밥은 먹었어요?"라고 묻던 그녀는 현실이 아닌 꿈결 같았다.

그녀의 여유와 다정함은 돈에서 나온 것이었겠지만, 당시 내게는 그저 천사의 자비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나의 가난을 비웃지 않았다. 내 낡은 운동화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나의 촌스러운 말투를 재미있어했다.

그녀 품에 안겨 있을 때면, 나는 평생 나를 따라다니던 가난의 악취가 씻겨 내려가는 듯한 구원을 느꼈다.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니, 그녀가 만들어주는 '따뜻하고 안전한 세상'을 사랑했다.

하지만 내가 대기업에 입사하고, 본격적으로 '계급'의 벽을 실감하면서부터 나의 사랑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동기들이 부모의 재력과 인맥으로 승승장구할 때, 나는 죽어라 야근을 해도 '개천용'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녀의 순수한 미소가 내 눈에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그 우아한 여유, 티 없는 밝음... 그것은 내가 평생을 바쳐도 가질 수 없는 '태생적 귀족'의 증명서였다.

나는 서서히 그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배경'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팔짱을 끼면, 나도 덩달아 상류층이 된 것 같았다. 그녀는 나의 초라한 출신을 가려주는 화려한 병풍이자, 내가 이 정글 같은 서울 바닥에서 주눅 들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신분증이 되어갔다. "오빠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배경을 사랑하는 것 같아."

그녀가 조심스럽게 건넨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혔을 때, 나는 화를 냈다. 내 진심을 모욕하지 말라며 소리치고, 절대 그렇지 않다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어떤 말로도 멀어지는 그녀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었고, 나는 결국 그녀에게 거친 완력까지 행사하고 말았다.

그 찌질하고 폭력적인 발악의 대가가 며칠 뒤 그녀의 부모가 우리 집을 찾아오는 것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내 사랑을 짓밟지 말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사실 내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없으면 나는 다시 그 악취 나는 반지하의 초라한 소년으로 돌아갈 거라는 지독한 공포가 나를 그런 괴물로 만들었음을.


"오빠, 우리 그만해. 오빠의 사랑은... 너무 무거워. 숨이 막혀."


그녀의 이별 통보는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사형 선고였다. 그것은 단순히 연인과의 헤어짐이 아니었다. 네가 없으면 나는 다시 '월급만 꼬박꼬박 받는 흙수저'로 전락한다는 공포. 내 완벽한 성공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경이 뜯겨나간다는 사회적 파산의 공포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를 미치게 하는 건, 이제 다시는 그녀의 그 봄날 같은 웃음을 볼 수 없다는 원초적인 상실감이었다. 내 비루한 자취방에 그녀가 채워주었던 온기, 나를 향해 "잘했어"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 손길, 내 칙칙한 인생을 환하게 비춰주던 유일한 등불이 꺼져버린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지옥을 견딜 자신이 없다. 차라리 파국이 낫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려서라도 내 밑바닥으로, 나와 같은 지옥으로 끌어내리고 싶다.

내 손가락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초인종을 향해 다가간다. 문 안쪽의 웃음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든다.


제발... 누가 나를 멈춰줘. 아니, 아무도 나를 막지 마.


3. 심연의 눈동자 :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자

초인종을 누르려던 검지 손가락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1센티미터. 그 찰나의 간격을 두고 내 손끝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문 안쪽에서는 여전히 그녀의 웃음소리가,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맑고 높은 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티 없이 맑은 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문이 열리고 그 웃는 얼굴을 향해 흉기를 휘두르는 상상을 하자, 역겨운 피 냄새가 훅 끼쳐오는 듯했다. 팽팽했던 분노의 장막이 찢어지며 덜컥 겁이 났다. 세상을 향한 복수라는 거창한 착각은 무너져 내리고, 자신이 한순간에 파렴치한 범죄자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바닥없는 수치심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때였다. 현관 옆 거울 속에 비친 내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 것은. 핏발 선 흰자위,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검은자위. 그 깊고 어두운 구멍 속에서 무언가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얄팍한 지식인 흉내를 내며 밑줄 그어 읽었던 니체의 문장이, 박제된 텍스트가 아닌 날카로운 현실의 칼날이 되어 내 목을 겨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동안 그녀의 부모를, 나를 무시한 세상을, 그리고 나를 버린 그녀를 '나를 망친 괴물'이라 규정했다. 그들이 나를 짓밟았기에, 그들이 내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기에 내가 이렇게 망가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거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 안의 억울함과 분노가 만든 그 깊은 심연 속에서 기어 나온 진짜 괴물은, 401호 안에 있는 그들이 아니었다. 흉기가 든 택배 상자를 생명줄처럼 껴안고, 사랑했던 사람을 파괴하려 입가에 거품을 물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니체는 말했다. 자신의 고통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며 증오로 갚으려는 마음, 그것이 바로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이라고. 그것은 강자가 아닌,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없는 '노예'들이나 갖는 도덕이라고 했다.

지금 내 꼴을 보라. "내가 못 가질 바엔 부숴버리겠다"는 이 추악한 심보.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내 비루함을 감추기 위해 타인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노예의 발악일 뿐이다.


"너는 지금, 네가 그토록 경멸하던 '개천의 미꾸라지'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려 하고 있다."

내면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 머리를 때렸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 흉기를 휘두르는 순간, 나는 영원히 인간의 궤도에서 이탈하게 된다.

진정한 강자는 타인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확인하지 않는다. 니체는 "자기를 극복하는 자만이 위대하다"고 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저 문 뒤의 그녀나 그녀의 부모가 아니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이 추악한 열등감, 사랑을 소유로 착각하는 저 짐승 같은 본능, 바로 '나라는 괴물'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택배 상자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몽키스패너의 차가운 냉기가 상자를 뚫고 내 손바닥에 전해졌다.


"으아아악!"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생애 가장 처절한 자기 극복의 몸부림이었다. 나는 401호를 등지고 비상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왔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편의점 앞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참아왔던 구토가 밀려왔다. "욱... 우욱..." 위액과 함께 내 안의 검은 독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행인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살인자가 되지 않았다. 나는 괴물이 되지 않았다. 나는... 비겁한 짐승이 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멈춰 섰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서울의 네온사인 사이로 희미한 별 하나가 보였다. 그녀를 잃은 상실감은 여전히 심장을 난도질했지만, 적어도 나는 나 자신을 영원한 심연 속으로 던져 넣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택배 상자를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잘 가라, 나의 비틀린 사랑아. 그리고... 잘 가라, 심연 속에서 울부짖던 슬픈 괴물아."


4. 별은 자신의 궤도를 돌 뿐, 서로를 소유하지 않는다

새벽 4시, 나는 빈손으로 자취방에 돌아왔다. 흉기가 든 택배 상자를 쓰레기장에 던져버리고 온 내 두 손은 텅 비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나는 먼지 쌓인 책장에 꽂혀있던 니체의 『즐거운 학문』을 꺼내어 책상에 앉아 다시 펼쳤다. 밤새 괴물과 싸우느라 너덜너덜해진 내 영혼 위로 문장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두 척의 배와 같다. 각자 자신의 목표를 향해 항해하다가 우연히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우리는 잠시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고 함께 정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다시 각자의 궤도를 따라 떠나야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애초에 서로 다른 별이었다. 그녀는 태생부터 눈부시게 화려한 빛을 뿜어내며 더 넓고 환한 은하를 향해 유유히 나아가는 항성이었고, 나는 춥고 어두운 변두리에서 위태롭게 깜빡이며 나만의 좁고 비탈진 궤도를 도는 초라한 별이었다. 하지만 빛의 밝기나 궤도의 크기가 존재의 가치를 다르게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저지른 진짜 죄악은 내 비루한 운명의 궤도를 스스로 걷는 대신, 내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 그녀의 찬란한 빛을 훔치려 했다는 데 있다. 나는 스스로 빛을 내는 법을 배우는 대신 그녀의 거대한 중력에 매달려 영원한 안락함을 누리려 했던 위성이자, 사랑을 빙자해 그녀의 후광을 착취하려 했던 비열한 '빛 도둑'이었다.

우리의 사랑이 어긋난 이유는 내가 가난해서도, 신분의 차이가 나서도 아니다. 내 이기적인 중력으로 그녀가 마땅히 빛나야 할 고유한 궤도를 교란시켰기 때문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별들의 우정'을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성숙한 사랑이란 상대를 내 궤도에 강제로 끌어당기거나 그 빛을 좀먹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거대한 우주의 법칙에 따라 각자의 궤도를 도는 두 개의 별이, 아주 우연히 궤도의 교차점을 지나며 짧지만 강렬하게 서로를 비추었던 기적 같은 사건이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마땅히 항해해야 할 넓고 눈부신 궤도가 있었고, 내게는 비록 춥고 비루할지언정 내 두 발로 오롯이 뚫고 나가야만 하는 고독한 궤도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빛이 너무 탐이 난 나머지, 억지로 궤도를 비틀어 그녀를 내 반지하 방으로 추락시키려 했던 나의 완력, 급기야 그녀를 스토킹하고 죽이려까지 했던 이 지독한 집착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 추악한 폭력이었다.

두 별이 잠시 겹쳐졌던 그 눈부신 교차점은 이미 지나갔다. 이제 우리는 그 짧았던 온기를 기억한 채, 각자에게 부여된 필연적인 궤도를 향해 다시 서늘하게 멀어져야 한다. 그것이 나라는 괴물로부터 그녀를 해방시키고, 나 역시 훔친 빛이 아닌 온전한 나의 빛을 찾아 나서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벽에 붙은 사진들을 하나씩 떼어냈다. 찢어발기거나 불태우는, 증오 섞인 의식이 아니었다. 조용히 앨범에 넣어 서랍 깊숙한 곳에 갈무리했다. 그것은 그녀를 내 기억에서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나의 소유물'의 자리에서 '독립된 주체'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정중한 예식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차단했던 그녀의 번호를 풀었다.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를 적어 내려갔다. "다시 만나자"거나 "미안하다"는 구차한 미련이 아니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너는 내게 과분한 봄날이었어. 이제 너의 궤도를 방해하지 않을게. 잘 지내라."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심장 한구석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은 썩어가는 상처의 고통이 아니라, 새살이 돋아나려는 간지러운 통증이었다. 나는 비로소 그녀를 '신분 상승의 도구'가 아닌,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존재 그 자체'로 떠나보낸 것이다.


5. 아모르 파티 : 욱신거리는 흉터를 안고 걷는 나의 궤도

이제 나는 다시 혼자다. 대기업 사원증도, 명문대 졸업장도 내 비루한 출신을 덮어주지 못한다. 나는 여전히 흙수저이고, 여전히 서울의 이방인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니체는 "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고 했다. 내가 밟고 온 그 진흙탕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의 단단한 두 다리를 갖게 되었음을 인정한다. 내 출신은 숨겨야 할 얼룩이 아니라, 내가 딛고 서야 할 나의 중력이다.

나는 이제 남의 별을 탐내며 궤도를 이탈하는 위성이 아니라, 비록 작고 희미할지라도 나만의 궤도를 도는 '단독자'로 살아가려 한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넥타이를 매고 거울 앞에 섰다. 어젯밤, 살의에 번들거리던 짐승은 사라지고, 조금은 슬퍼 보이지만 단단한 눈빛을 가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출근하자. 이것이 진짜 내 삶이니까."

덜컹거리는 출근길 지하철 3호선. "이번 역은 압구정, 압구정역입니다."

어젯밤 내가 괴물이 되어 서성거렸던 그 요새. 익숙한 지명이 흘러나오자 반사적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당장이라도 저 화려한 세상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미련과 도망치고 싶은 수치심이 뒤엉켜 밀려왔다.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상실감의 통증도 여전했다. '안녕, 나의 콤플렉스' 같은 산뜻한 해방감 따위는 현실에 없었다. 이 상처는 흉터로 남아 꽤 오랫동안 나를 욱신거리게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열리는 문을 향해 뛰쳐나가지 않았다. 고통스럽지만, 이 비루하고 평범한 일상의 무게야말로 내가 짊어져야 할 진짜 나의 '운명(Amor Fati)'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문이 닫히고, 열차가 다시 어둠을 뚫고 내 일터가 있는 광화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흔들리는 손잡이를 꽉 쥐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위태로운 중심을 잡았다. 아프고 고단하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묵묵히 나의 궤도를 걸어갈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해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내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묵직하게 지하도를 울렸다. 뚜벅, 뚜벅.

그것은 다 털어낸 자의 가벼운 발걸음이 아니었다. 상실과 열등감이라는 삶의 무게를 온전히 끌어안고, 비로소 자신만의 궤도를 걷기 시작한 인간의 쓰라리고도 홀가분한, 나약하나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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