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실직자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니체

by 하노이별

1장. 오답 처리가 된 마흔다섯의 사내

새벽 5시, 알람 소리도 없는데 눈이 떠졌다. 20년간 내 몸에 새겨진 증권맨의 생체시계는 야속하게도 정교했다.

하지만 손을 뻗어 확인한 스마트폰 화면에는 더 이상 읽어야 할 글로벌 지수도, 긴급한 고객의 메시지도 없었다. 어제까지 나의 우주를 지탱하던 ‘OO증권 팀장’이라는 명함은 이제 서재 책상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거실 너머로 둘째의 첼로 소리가 들려왔다. 예고 입시를 앞둔 아이의 활 소리는 평소의 우아함을 잃은 채, 오늘따라 살점을 베어내는 날카로운 비명처럼 내 폐부를 찔렀다.

나는 서재 문을 닫는 대신, 대출 이자가 빠져나간 비어가는 통장과 기한이 임박한 학원비 고지서를 번갈아 보며 쉼 없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두드리는 것은 계산기였으나, 정작 부서지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평생 ‘수치’라는 우상을 숭배해 왔다.

소수점 아래 숫자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타인의 자산을 굴려주던 그 기민함으로, 내 인생의 무게 또한 연봉과 아파트 평수, 아이의 성적표로 정교하게 계량해 왔다. 그 숫자들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방어해 주는 견고한 신전이자,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유일한 언어였다.

그러나 직장이라는 성벽이 허물어진 자리에는 텅 빈 껍데기뿐인 마흔다섯의 사내가 악취를 풍기며 널브러져 있었다.

명함이 사라지자 나는 이름 없는 유령이 되었고, 매달 내 가치를 입금해주던 숫자의 마법이 풀리자 가장 사랑하는 가족에게조차 '미래를 담보 잡힌 채무자'가 된 기분이었다.

내 존재가 통째로 오답 처리 되었다는 서늘한 사형 선고, 그것이 내 실직의 진짜 얼굴이었다.


2장. 구원의 외주화 : 리스크를 헤지(Hedge)하려다 파산한 순례자

나는 이 비루한 현실에서 도망치듯 산티아고행 티켓을 끊었다. 그것은 용기 있는 결단이 아니라, 비겁한 회피였다.

서재의 질식할 것 같은 공기를 피해 스페인의 황량한 지평선 뒤로 숨고 싶었다. 그곳의 성스러운 ‘길’이 내 고장 난 인생에 새로운 경로를 찍어줄 지도로 보였다. 명함이라는 신전이 무너지자마자, 나는 또다시 순례길 완주라는 외부의 존재에게 내 구원을 외주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자수성가한 동창 녀석을 동반자로 삼은 것조차 증권맨다운 철저히 계산된 종속적 출발이었다.

녀석은 바람피다 걸려 이혼 위기에 몰리자 도피를 택했고, 나는 그 비겁한 신세에 올라타 내 생존의 리스크를 헤지(Hedge)하고 싶었을 뿐이다. 녀석에게 산티아고는 "나 반성하고 있어!"라는 가면을 빌려 쓸 무대장치였고, 내게는 타인의 재력에 기댄 채 실직의 비루함을 은폐할 비상구였다.

이 비겁한 공생은 ‘은의 길(Vía de la Plata)’ 위에서 단 사흘 만에 파국을 맞았다.

발목 통증을 핑계로 드러누운 친구는 마드리드의 5성급 호텔로 도망치자며 나를 유혹했지만, 나는 아픈 친구를 남겨두고 홀로 배낭을 멨다.

비정함이라기보다, 그것은 생존을 향한 짐승 같은 악착함이었다. 내게 산티아고 완주는 단순한 여행의 마침표가 아니었다. 명함도, 신전도, 미래도 송두리째 압류당한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내 손으로 쟁취할 수 있는 마지막 ‘성적표’이자, 이 지옥 같은 패배감에서 나를 건져 올려줄 단 하나의 구원이라는 동아줄이었다.

만약 여기서 친구를 따라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영원히 '실패한 실직자'라는 낙인을 지우지 못한 채 삶의 폐기물로 남겨질 것만 같았다. 이 공포가 우정보다 뜨거웠다.

나는 아픈 친구의 눈망울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그 눈동자에 비친 나의 초라한 종말을 외면한 채 절벽 끝에 매달리듯 길 위로 몸을 던졌다. 그것은 순례가 아니라, 단 한 조각의 자존감이라도 건져 올리기 위해 피를 흘리며 기어가는 처절한 도주였다.

나는 그렇게 800km를 걸어 완주 증명서를 손에 넣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현실은 더 지독한 지옥이었다.

동창 단톡방은 나를 향한 저주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픈 친구 버리고 제 갈길 간 냉정한 죽일 놈.” 녀석은 자신의 나약함을 가리기 위해 나를 악마로 조각해 놓았고, 나는 순식간에 의리도 양심도 없는 독종이 되었다.

800km, 6주의 그 개고생을 하고도 왜 나는 여전히 이 비루한 현실의 중력에서 단 1cm도 벗어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가.


3장. 은의 길에서 만난 망치 : 낙타의 등을 부러뜨리다

완주 증명서를 손에 넣으면 내 괴로움에 대한 해답이 거기 적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섰을 때 마주한 것은 신성한 구원이 아니라 지독한 공허였다.

나는 회사라는 신전에서 쫓겨나 '순례길'이라는 또 다른 신전을 세우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을 뿐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죽일 놈'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서재에 다시 갇혔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산티아고로 떠난 이유는 걷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 내게 "이제 괜찮다"라고 말해줄 절대적인 답을 구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도망칠 곳조차 없어진 서재에서 나는 우두커니 책장만 바라보았다. 평생을 파고들었던 수많은 경제 지표와 투자서들 틈에서, 언젠가 장식용으로 꽂아두고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먼지 쌓인 철학 책 한 권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숨 막히는 현실에서 잠시라도 눈을 돌리고 싶어 무작정 책을 빼들어 아무 페이지나 펼친 순간이었다.

그 번민의 한복판에서, 활자 속의 니체는 망치를 들고 나타나 내게 묻는다.


"너는 왜 아직도 남의 짐을 지고 사막을 걷는 낙타로 살고 있는가?"


내가 지고 있던 짐은 실직 후에도 여전히 육중했다. 20년간 쌓아 올린 '엘리트 증권맨'의 자긍심,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강한 아버지'의 환상, 자식의 미래를 위해 내 영혼을 갈아 넣는 '희생적 책임감'.

나는 사회가 정한 성공의 잣대를 내 척추에 박아 넣은 채, 그 무거운 짐들이 내 존재의 무게인 줄 착각하며 살았다. 명함이 사라진 자리에도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과 평판이라는 모래주머니를 쌓아 올렸다.

니체의 시선으로 본 나의 순례는 자아를 찾는 여정이 아니라, 낡은 가치를 버리지 못한 채 사막에서 헐떡이는 낙타의 비참한 행보였다. 내 괴로움의 실체는 스스로 가치를 창조할 힘이 없어 밖에서 나를 증명해 줄 '우상'을 찾아 헤맨 나의 종속성 그 자체였다.


4장. 사자의 포효 : 거리의 파토스와 우상의 파괴

이제 사자가 되어 포효할 시간이다. 니체는 망치를 들어 내가 숭배하던 그 견고한 우상들을 내리치라고 명령한다.

친구들이 던지는 "죽일 놈"이라는 돌멩이를 맞으며, 고백하건대 나는 처음엔 니체의 철학 뒤로 비겁하게 숨으려 했다. 내가 아픈 친구를 두고 온 것을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평범한 무리의 도덕은 비겁하게 뭉치는 데서 안정을 찾지만, 고귀한 정신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보존하는 법이라고. 녀석들이 나를 욕하는 이유는 내가 그들의 나약한 동정론에 가담하지 않고 내 갈 길을 갔기 때문이라고 그럴듯하게 합리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깨어난 '사자'의 망치는, 세상이 세운 우상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추악한 변명마저 가차 없이 박살 냈다.

진실을 마주하자. 친구를 버린 것은 고귀한 결단이 아니라, '실패자'라는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 벌인 처절하고 이기적인 도주에 불과했다. 진정한 '거리의 파토스'는 친구들을 향해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단톡방의 비난에 벌벌 떨며 어떻게든 내가 옳았다고 변명하고 싶어 하는 그 알량하고 나약한 '과거의 나'로부터 철저하게 거리를 두는 일이었다.

비난받는 '죽일 놈'이 된 지금, 나는 변명이라는 방패를 버리고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나의 밑바닥과 마주한다. 나는 여전히 명함 한 장 없는 초라한 실직자이며, 사회적 기준에서 보자면 명백한 '실패자'다. 나아가 위기의 순간에 친구마저 버린 이기적인 놈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들의 인정이라는 구걸에서, 그리고 나 자신을 포장하려던 위선에서 손을 뗀다. 엘리트 증권맨이라는 허울, 좋은 아버지라는 껍데기, 남들의 부러움을 사야 한다는 성공의 압박들. 나는 이 모든 '사회적 우상'들을 사자의 발톱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나를 억누르던 "너는 해야 한다"는 외부의 명령을 향해, 나는 이제 서늘하게 "나는 원한다"라고 포효한다.

실직자이자 이기적인 놈이라는 처지는 더 이상 부끄러운 낙인이 아니라, 나를 옥죄던 모든 가짜 가치와 위선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증거다.

지켜야 할 번듯한 명함도, 남들에게 보여줄 알량한 의리마저 산산조각 난 이 폐허 위에는 역설적으로 잃을 것이 없는 자의 후련함이 감돈다. 더 이상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어지자, 나를 칭칭 감고 있던 타인의 시선이라는 밧줄이 비로소 스르르 풀려나갔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저 멀리 산티아고의 성당도, 대단한 철학자의 문장도 아니었다. 타인이 정해놓은 성공의 잣대를 모조리 거부하고, 비루하면 비루한 대로 껍데기가 다 벗겨진 채 폐허 위에 홀로 서 있는 이 순간의 나 자신일 뿐이다. 이 쓰라린 알몸의 상태가 도리어 나를 온전히 숨 쉬게 한다.

나는 비로소 '세상이 인정하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며 내 등을 짓누르던 낙타의 무거운 짐을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그리고 그 한결 가벼워진 어깨로, 남의 눈치가 아닌 내 심장의 박동을 기준 삼아 나만의 법을 세우는 입법자가 된다.


5장. 어린아이의 탄생 : 아모르 파티, 생의 성스러운 긍정

사자의 파괴가 끝난 자리에 남은 것은 거대한 허무였다. 모든 우상을 때려 부수었건만, 당장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마주해야 할 냉엄한 현실은 조금도 부서지지 않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갚아야 할 대출 이자는 꼬박꼬박 돌아오고, 기한이 임박한 아이의 학원비 고지서는 책상 위에서 나를 짓누른다. 머리로는 모든 가짜 가치에서 해방되었다고 호기롭게 외쳤지만,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뒤척이는 가슴 한구석에는 생존을 향한 짐승 같은 두려움이 질기게도 남아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이 두려움을 지우려 하루빨리 번듯한 직장을 구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시달렸다. 밤마다 구인 사이트를 뒤적이며 예전과 비슷한 연봉, 비슷한 직함의 빈자리를 찾으며 전전긍긍했다. 내 인생의 제2막은 무너진 1막의 영광을 서둘러 복구하고, 다시 누군가에게 쓸모를 인정받는 일이라고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어코 아침은 밝아왔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서늘한 아침 햇살을 마주하며, 나는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기로 결심한다. 두려움에 잡아먹힌 채 조급하게 남의 밑으로 다시 기어들어 갈 것인가, 아니면 이 비루한 폐허마저 내 놀이터로 삼을 것인가.

그 지독한 흔들림의 끝에서, 나는 드디어 후자를 택한다. 이 거대한 허무는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무한한 가능성의 백지라는 것을 떨리는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비로소 니체가 말한 정신의 마지막 단계, '어린아이'가 내 안에서 태어난다.

어린아이는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계산하지 않는다. 파도가 밀려오면 곧 흔적도 없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세상의 잣대로는 아무런 돈도 쓸모도 되지 않는 무가치한 모래성일지라도, 그저 지금 이 순간 그것을 쌓아 올리는 유희 자체에 온전히 몰입할 뿐이다. 애써 쌓은 것이 무너지더라도 아이는 절망하는 대신 웃으며 다시 새로운 모래성을 짓기 시작하니까.

나는 다시 거실로 나온다. 둘째의 첼로 소리가 들린다. 어제까지 그것은 내 지갑을 축내는 불안의 비명이자 빨리 돈을 벌어오라는 독촉장 같았으나, 오늘 나에게는 삶이 연주하는 눈부신 소음이다.

실직의 현실도, 불투명한 아이의 미래도 변한 것은 없다. 여전히 나는 매달 돌아오는 대출 이자를 걱정해야 하고, 명함 없는 하루를 어떻게 채울지 막막해하며, 잘난 체하는 친구들의 비웃음을 견뎌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마주한 비루하고도 서늘한 현실의 민낯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 결핍과 비난을 극복해야 할 재앙이 아니라, 내가 새롭게 채워 넣을 유희의 도화지로 받아들인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마주한 인생 제2막은 누군가 그려놓은 궤도 위를 안전하게 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해진 답이 없는 백지 위에 서툴지만 나만의 색깔을 칠해가는 자유로운 과정이다. 서둘러 과거의 명함을 되찾겠다는 조급함을 내려놓자, 비로소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통장 잔고의 수치에 비굴해지던 어제의 나를 죽이고, 타인의 비난에 억울해하던 나약한 자아를 넘어선다.

무엇보다 번듯한 명함과 자산을 훈장처럼 달고 승승장구하는 동창들을 보며, 애써 초연한 척 숨겨왔던 비루한 질투심을 이제는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들의 안락함을 부러워하며 내 처지를 연민하던 그 은밀한 예속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 그것이 나의 진짜 '자기 초극'이다.

실직은 사회적 낙인이 아니라, 나를 규정하던 낡은 껍데기를 벗겨내고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게 해준 운명의 선물이었다. 내 가치는 숫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비극적인 상황조차 "이것이 삶이었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라고 외칠 수 있는 나의 긍정이 결정한다.

나는 이제 비루함과 고귀함이 뒤엉킨 이 생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로 했다. 사자의 망치를 내려놓은 자리에 아이의 웃음이 차오른다.

나는 밖에서 답을 찾으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 안의 창조적 힘을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내 안으로의 여행을 시작하려 한다. 조급한 재취업으로 타인의 왕국에 다시 종속되는 대신, 오늘 하루 나의 생존을 나라는 우주를 새롭게 입법하는 성스러운 놀이로 만들 것이다.

창가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을 바라보며, 나는 나지막이 읊조린다.

"나는 지금 이 비루하고도 눈부신 나의 운명을 사랑하기로 했다. 내가 딛고 선 이 땅, 내가 견뎌낼 모든 시간, 그리고 앞으로 마주할 생의 모든 굴곡이 이제 나에게는 그 어떤 순례길보다 거룩한 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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