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열기 속에서 다시 태어난, 야생의 전사를 위한 서사
한겨울인데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자려고 누우면 심장이 이유 없이 쿵쿵거려 마치 천장에 누군가 매달려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이불을 걷어차면 춥고, 덮으면 다시 용광로 속에 들어온 것처럼 달아올랐다.
며칠째 이어지는 불면과 홍조를 견디다 못해 찾아간 산부인과 진료실. 의사는 모니터만 응시하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완경이시네요."
"네? 완... 뭐라구요?"
낯선 단어에 내가 되묻자, 의사는 그제야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고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귀찮다는 듯, 혹은 매일 반복하는 설명이라 지겹다는 듯 건조한 말투였다.
"폐경(閉經)이요. 요즘은 어감이 안 좋다고 해서 '완경(完經)'이라고 부릅니다. 월경을 무사히 마쳤다는, 뭐랄까... 좀 더 긍정적인 의미죠. 자연스러운 과정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의사는 기계적으로 처방전을 출력해 내밀었다. 진료실을 나와 수납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신체적 열기가 아니라, 모멸감에 가까운 분노였다.
"완경? 완성은 무슨 놈의 완성."
그 말장난이 내 속을 더 뒤집어 놓았다. 그것은 마치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는 사람에게 "당신은 직장 생활을 훌륭히 '졸업'했습니다"라며 포장된 상장을 쥐여 주는 꼴이었다. 내 몸은 지금 낡은 공장처럼 셔터를 내리고 문을 닫고 있는데, 의사는 옆에서 "축하합니다, 당신은 여성으로서의 과업을 훌륭히 완수했습니다!"라며 종이로 만든 가짜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있는 격이다.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언어적 성형수술이다. 주름진 현실에 보톡스를 놓는다고 해서 지나간 청춘이 돌아오는가? 단어 하나를 '완경'으로 바꾼다고 해서, 뼈마디가 쑤시고 우울감에 시달리는 내 몸의 고통이 '우아한 마침표'로 둔갑하는가? 천만에.
나는 세상이 던져주는 그런 값싼 동정과 사탕발림이 싫다. 차라리 '폐경'이라는 서늘하고 잔혹한 단어가 내게는 더 정직하다. 나는 지금 '완성'된 게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한 챕터가 가차 없이 '폐쇄'된 것이다. 그 절벽 앞에 선 공포를 '완경'이라는 달콤한 포장지로 퉁치려 하지 마라.
언어의 유희를 걷어내고 마주한 거울 속 내 현실은 처참했다. 나는 평생 나 자신을 '꽃'으로 가꾸며 살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꽤 '화려한 꽃'이었다.
젊은 시절, 내 미모는 그 어떤 스펙보다 강력한 권력이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은 나에게 꽂혔고, 그 부러움 섞인 찬사는 당연한 세금처럼 나에게 바쳐졌다. 내가 살짝 웃어주기만 해도 세상의 문들은 너무도 쉽게 열렸다. 여성성은 나에게 갑옷이자,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다.
그런데 꽃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지금, 거울 속에는 낯선 여자가, 아니 성별을 잃은 누군가가 서 있다.
“너는... 누구냐?”
푸석해진 머릿결, 탄력을 잃고 흘러내린 턱선, 튜브처럼 불룩 튀어나온 뱃살. 아무리 비싼 크림을 발라도 건조하게 갈라지는 피부는 내가 생기를 잃은 고목(古木)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낙인 같았다.
이 상실감은 평범하게 살아온 여자들이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지옥이었다. 원래 가진 게 없던 사람은 잃을 것도 없다. 하지만 왕관을 썼던 여왕이 하루아침에 평민으로 전락하는 추락은 견딜 수 없는 비참함이다. 나를 지켜주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녹슬어 부러진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나는 무장 해제된 패잔병처럼 거울 앞에서 떨었다.
"이제 나는 여자로서 끝난 건가?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투명 인간이 되어, 그냥 '아줌마'로 불리다가 쭈그려 드는 일만 남은 건가?"
상실감은 몸에만 머물지 않고 정신을 갉아먹었다. 아이들은 다 커서 제 품을 찾아 떠났고, 남편은 늙어가는 아내를 낡은 가구 취급한다. 빈 둥지에 홀로 남은 나는, 말라비틀어진 자궁을 부여잡고 서럽게 울었다.
아이를 더 낳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육아 전쟁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 그런데도 의사에게 "더 이상 임신은 불가능합니다"라는 생물학적 사망 선고를 듣자,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서러웠다. 도대체 왜일까.
그것은 '선택권의 박탈' 때문이었다. 내가 안 낳는 것과, 몸이 못 낳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문을 열고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문이 밖에서 철컥 잠겨버리자 영영 갇혀버린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그것은 단순히 생식 능력의 상실이 아니라, 세상이 내게 부여한 '여자로서의 유통기한'이 끝났다는 일방적인 통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안개처럼 밀려와 나를 질식시켰다. 나는 지금 벼랑 끝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나의 고통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남편의 태평한 숨소리는 지독한 무심함이 되어 내 가슴에 섬뜩한 살의를 지폈다. 시선을 돌려 마주한 TV 속에는 싱싱한 젊음의 활력이 넘쳐나는 여자들이 웃고 있었다.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그들의 눈부신 생명력은 시들어가는 나의 현재와 너무도 극명하게 대조되어, 견딜 수 없는 상실감과 지독한 질투심으로 나를 난도질했다. 결국 나는 도망치듯 채널을 돌려버린다. 나는 세상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주연에서 엑스트라로 밀려나고 있었다.
도대체 이 히스테릭한 몸뚱이를 데리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억지로 '우아한 중년' 흉내를 내며 늙어감에 초연한 척 연기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젊음에 집착하며 유명 성형외과를 전전하며 추하게 발버둥 쳐야 하는가? 나는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그 지독한 혼란과 자기혐오의 끝자락에서, 나는 문득 니체의 문장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만약 니체가 내 앞에 있었다면, 완경이니 제2의 사춘기니 하며 현실을 미화하려 드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을 것이다.
"너희는 왜 고통의 민낯을 보려 하지 않고, 예쁜 가면을 씌워 외면하려 드는가?"
니체는 고통을 숨기거나 언어로 포장하려 하지 말라고 했다. 대신 그는 내 멱살을 잡고 절벽 아래, 펄펄 끓는 용암을 가리킨다.
"존재로부터 가장 큰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다음과 같다. 위험하게 살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희의 도시를 건설하라!" (『즐거운 학문』)
처음 이 문장을 접했을 때는 세상이 정해준 궤도를 벗어나는, 젊은 날의 치기 어린 객기나 무모한 모험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갱년기의 한복판에서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지금, 이 문장은 전혀 다른 날카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세상은 갱년기를 치료해야 할 질병이나 감춰야 할 노화로 취급한다. 어떻게든 약을 먹고 감정을 억눌러서, 다시 온순하고 얌전한 중년 여성이라는 '안전한 평지'로 서둘러 돌아가라고 타이른다. 하지만 니체는 그 안락한 평지가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화산 비탈'에 아예 너의 집을 지으라고 명령한다.
여성성이라는 화려함, 남편과 아이를 돌보는 희생적인 엄마라는 역할이 보장해주던 그 견고하고 지루한 평지에 미련을 버리라는 뜻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내 안의 변덕과 끓어오르는 욕망, 이 위험하고 거친 에너지 자체를 나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으라는 도발적인 초대장이었다.
지금 내 몸이 바로 베수비오 화산이 아닌가. 시도 때도 없이 열기가 솟구치고, 감정이 폭발하며,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공격하는 이 위험천만한 상태.
나는 그동안 결함 하나 없이 매끄럽고 탄탄한 육체라는, 그 오만하리만치 안전한 평지 위에서만 살아왔다. 펄펄 끓는 용암이 분출되는 지금의 위험한 신체와 달리, 그때의 내 몸은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젊음의 자신감으로 무장한 견고한 대지였다. 남들이 보기에 좋은 삶이나 예쁜 여자로서의 삶은 그 단단한 지반 위에서 누리는 당연한 특권이었다.
하지만 갱년기는 그 평지에서 나를 쫓아내 이 위험한 비탈길로 밀어 넣었다. 나는 더 이상 그 평지에 머무를 수 없어, 베수비오 화산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아무리 지난날의 안락함을 그리워하며 매달려도, 다시는 그 평지로 돌아갈 수 없다.
처음에는 타들어 가는 잿더미 위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과거 쪽만 바라보며 울었다. 누군가 와서 나를 다시 저 푸르른 평지로 데려가 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 밤을 울어도 구조대는 오지 않았다. 젊음으로 되돌아가는 배는 이미 침몰했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인정하게 되었다.
오지 않는 구조대를 기다리며 바닥을 기는 내 꼴이 비참함을 넘어 혐오스러워질 때쯤, 그 자괴감은 나를 버린 세상을 향한 서늘한 오기로 바뀌었다. 나를 유통기한 끝난 상품 취급하며 이 불길 속에 던져두었지?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차가운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 내 안에서 뜨거운 독기가 솟구쳤다.
여기서 평지만 바라보다 말라비틀어져 죽을 것인가? 아니면 이 끓어오르는 땅이라도 씹어 먹고 살아남을 것인가.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누군가의 손길만 기다리는 무력한 조난자가 되거나, 내 두 발로 서서 나를 구원하는 강력한 구조자가 되거나.
나는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남에게 운명을 맡기고 비굴하게 연명하지 않겠다.
나는 이곳에서 오지 않는 구조대를 기다리는 불쌍한 피난민으로 남지 않겠다. 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는 오직 나 자신뿐이다. 평지로 돌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나는 이 펄펄 끓는 불의 땅을 기꺼이 내 영토로 삼는 거친 개척자가 되겠다.
일단 이 화산의 비탈을 내 것으로 선포하고 나면, 그 경계 안에서는 더 이상 세상이 정해놓은 뻔한 규칙 따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나는 잿더미 위에서도 내 발길이 닿는 곳마다 나만의 튼튼한 진지를 새로 구축하기로 결심했다.
이 갑작스러운 이주가 과연 저주인가? 아니다. 이것은 이제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오직 너 자신으로 살라는, 내 생명이 보내는 가장 강력한 신호다. 나는 이 불안한 영토를 나의 새로운 기지로 선포한다.
이 거창한 독립선언은 대단한 혁명이 아니라, 내 발밑의 아주 사소하고 뻔뻔한 일상의 반란에서부터 시작된다.
남편의 저녁 밥상을 차려주기 위해 내 소중한 약속을 취소하지 않는 이기심으로 내 영토의 첫 경계선을 긋고, 뱃살이 좀 보이면 어떤가, 내가 입고 싶었던 딱 붙는 빨간 원피스를 과감하게 사 입는 뻔뻔함으로 나만의 튼튼한 갑옷을 갖춰 입는다.
우아한 꽃꽂이 대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드럼을 배우러 가는 무모함으로, 시뻘건 용암이 터져 나오는 이 화산을 무대 삼아 폭발하듯 드럼 스틱을 두드려댄다.
세상은 나를 향해 제멋대로인 주책바가지 아줌마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 주책과 제멋대로야말로 갱년기라는 흔들리는 땅 위에서 나를 지켜주고 자유롭게 숨 쉬게 할,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강력한 요새니까.
침략자의 눈으로 다시 거울 속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낯설고 투박해진 그 얼굴을 더 이상 '망가진 여자'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이제 신대륙에 상륙하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장식품들을 떼어낸 '야생의 전사'다.
냉정하게 돌아보자. 내가 그토록 잃고 싶지 않아 했던 '예쁜 여자'의 권력이란 것은, 실상 얼마나 피곤한 중노동이었던가. 그때는 그 왕관이 내 전부인 줄 알고 필사적으로 지켰지만, 이제 와 그것이 강제로 벗겨지고 보니 비로소 보인다. 내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귀하게 모셨던 그 미모가, 사실은 얼마나 무거운 족쇄였는지를 말이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항상 배에 힘을 주고, 주름 하나에 전전긍긍하던 시절은 화려했지만 감옥이었다. 꽃은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없다. 그저 누군가 와서 봐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 왕관이 벗겨지니 비로소 머리가 가볍다. 남자들의 시선에서 '투명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다. 나는 더 이상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다. 나는 내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 발로 지면을 누비는 진정한 주체가 되었다.
나는 관상용 꽃의 운명을 거부하고, 거친 흙바닥을 뒹굴며 뿌리를 내리는 튼튼한 나무가 되기를 선택했다. 니체의 시선으로 보자면, 지금의 나는 성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인간 그 자체'로 귀환하는 중인 것이다.
폐경은 '결핍'이 아니라 '위대한 해방'이다. 월경의 피비린내에서, 종족 보존의 의무에서, 그리고 "여자라면 그래야 한다"는 지독한 코르셋에서 완전히 탈출하는 날이다. 내 몸에서 솟구치는 열기는 증상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비가 되기 위해 번데기 속에서 뿜어내는 '변태의 에너지'이자, 침략자의 심장에서 타오르는 용암의 박동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려면 자신의 몸을 녹이는 고통을 겪어야 하듯, 지금 나는 젊은 시절의 껍질을 태워버리고 더 자유로운 존재로 진화하기 위해 뜨겁게 연소하는 중이다. 나는 이제 내 몸의 변화를 '상실'이 아닌 '진화'로 재정의한다. 꽃은 시들지만, 나무는 나이테를 두르며 더 거대해진다. 나의 여성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넓고 거친 인간성으로 확장되고 있다.
또다시 열이 오른다.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뛴다. 이제 나는 이 열기를 내 생명력의 증거이자, 침략자의 심장에서 울리는 북소리로 받아들인다.
"그래, 타올라라! 나는 아직 살아있다. 나는 시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뜨겁게 연소하고 있다."
나는 거실 한복판에서 춤을 춘다. 블루투스 스피커가 터져라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를 틀어놓고, 그 쿵짝거리는 테크노 뽕짝 리듬에 내 심장 박동을 맞춘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추던 우아한 왈츠 따위는 집어치웠다. 엇박자로 팔을 휘젓고, 내 멋대로 몸을 흔드는 '막춤'이다. 삐걱거리는 관절, 출렁이는 뱃살, 흐르는 땀방울... 이 모든 것이 나의 춤이다.
니체는 "춤출 줄 모르는 신은 믿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갱년기라는 신과 함께, 아니 갱년기라는 야생마의 등 위에 올라타 춤을 춘다. 이 지독한 호르몬의 변덕조차 내가 사랑해야 할 나의 운명, 아모르 파티(Amor Fati)이다.
나는 더 이상 '여자'라는 감옥에 갇히지 않겠다. 나는 '아줌마'라는 멸칭에도 기죽지 않겠다. 세상이 '완경'이라는 말랑한 단어로 나를 위로하려 들 때, 나는 코웃음 치며 말할 것이다.
"내게 그런 어설픈 위로 따윈 필요 없어. 나는 지금 가장 뜨거운 내 인생의 비탈길을 정복하는 중이니까."
나는 이제 안전한 평지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유목민이다. 나는 남편의 밥상보다 내 욕망의 허기를 먼저 채우는 이기적인 정복자다. 그리고 나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을 부수고 나온 제멋대로인 주책바가지다.
오늘도 내 몸은 화산처럼 달아오른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나는 이 열기 속에서 과거의 나약했던 껍질을 기꺼이 태우고, 새로운 나로 매일매일 다시 태어날 것이다.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 내 깃발을 꽂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불안한 생을, 이 폭발하는 에너지를 기꺼이 사랑해 주자.
이것이 50대, 갱년기의 한복판에서 내가 찾은 니체의 매우 위험한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