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토를 침범하는 신神과의 전쟁

니체의 망치를 든 며느리

by 하노이별

1. 황금 비늘을 두른 용의 강림

"삐비빅-"

주말 아침 9시, 평온한 공기를 찢고 현관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린다. 벨을 누르는 법은 없다. 비밀번호를 공유하고 있는 그분에게 내 집의 현관문은 허락받고 들어오는 문이 아니라, 언제든 점령군처럼 입성할 수 있는 개방된 성문일 뿐이다.

나의 시아버지가 오신다. 이 집안의 절대 군주이자, 우리 부부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살아있는 신(God)’이 강림하신다.

그는 빈손으로 오지 않는다. 겉보기엔 손주들을 위한 비싼 과일 바구니를 들었지만, 그 이면에는 ‘막대한 유산’이라는 황금 지팡이와 ‘대를 이어야 한다’는 낡은 족보를 양손에 꽉 쥐고 있다. 그는 내 집 거실을 마치 자신의 영지(領地)를 순찰하듯 위풍당당하게 가로지른다.

남편은 반사적으로 소파에서 튀어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 나간다. 회사에서나 볼 법한 깍듯한 폴더 인사. 집안에서도 그는 아이들의 아빠나 한 여자의 남편이 아니다. 아버지의 거대한 그늘 아래 조아리는 ‘영원한 상속 예정자’이자, 가업을 잇기 위해 영혼까지 저당 잡힌 순한 양일뿐이다.

아버지가 쥔 막대한 유산과 회사 지분이라는 목줄이 남편의 척추를 유연하게, 아니 비굴하게 만들었다. 경제적 종속은 그렇게 한 가장의 권위를 소리 없이 삭제해 버렸다.

거실 한복판에 선 아버님의 뒷모습에서 나는 가끔 헛것을 본다. 번쩍이는 황금 비늘을 온몸에 두른 거대한 용의 형상. 그 번들거리는 비늘 하나하나에는 소리 없는 명령어가 빽빽하게 적혀 있는 듯하다.

"이 아파트는 내 돈으로 샀다." "네 남편의 월급도 내 주머니에서 나온다." "그러니 너희는 마땅히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

이 압도적인 황금빛 포효 앞에서 며느리인 나는 숨을 죽인다. 경제적 풍요라는 달콤한 먹이 앞에 자존심을 거세당한 우리는, 그저 납작 엎드린 채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용의 진짜 목표물은 우리 부부가 아니다. 그는 거실을 가로질러 내 품 안의 가장 연약한 살점, 나의 아이들을 향해 그 탐욕스러운 아가리를 벌린다.


2. 오염된 영토 : 왕자와 들러리들

"아이고, 우리 장손! 어디 있냐, 내 새끼!"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아버님의 시선은 레이저처럼 정확하게 큰아이 하나에게만 꽂힌다. 거실에서 놀고 있던 셋째가 "할아버지!" 하고 달려가 다리에 매달리지만, 그분의 두툼한 손은 막내의 머리를 대충 한번 쓰다듬고는 거침없이 큰아이를 향해 직진한다.

"자, 할아비가 우리 장손 주려고 백화점 가서 사 왔다."

쇼핑백에서 나오는 건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최신형 로봇 장난감이다. 물론 하나뿐이다. 딸아이와 막내는 그 화려한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거나, 내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다. 그 순간, 내 거실의 공기는 ‘가족’에서 ‘계급’으로 순식간에 재편된다.

할아버지의 등장을 기점으로 큰아들은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다. 내 앞에선 순하던 녀석이 할아버지 무릎에 앉는 순간,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장수처럼 눈빛부터 오만해진다.

"야, 이거 내 거야. 만지지 마!"

형의 장난감을 구경하러 다가온 동생을 큰아이가 거칠게 밀친다. 셋째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명백한 폭력이다. 나는 즉시 아이를 제지한다.

"첫째! 동생 밀치면 안 된다고 했지. 사과해. 그리고 장난감은 같이..."

"아이고, 애 기죽게 왜 소리를 지르냐!"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님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훈육의 대상은 아이가 아니라 나다.

"형제가 크다 보면 치고받고 할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눈을 부라려? 우리 장손 놀랐잖아. 괜찮다, 내 새끼. 할아비가 다 막아줄게."

아버님은 잘못을 저지른 손자를 꾸짖기는커녕 품에 더 꼭 끌어안으며 나를 노려보신다. 그 품 안에서 아이는 나를 힐끔 쳐다보며 비릿하게 웃는다. 그건 엄마의 권위가 할아버지의 돈과 권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본능적으로 간파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섬뜩하고도 영악한 미소다.

"여보, 애 버릇 나빠져요. 아버님 좀 말려봐요."

내가 다급하게 남편을 쳐다보지만, 그는 내 시선을 피한 채 헛기침만 하며 TV 채널을 돌린다. 아버지의 회사, 아버지의 카드, 아버지의 집... 그 모든 ‘아버지의 것’들에 묶인 남편은 제 자식이 망가지는 꼴을 보면서도 입도 뻥끗하지 못한다.

이것은 단순한 편애가 아니다. 내 아이들의 영혼이 돈과 핏줄이라는 폭력에 의해 실시간으로 오염되고 있는 재난 현장이다.


3. 내 거실의 거대한 용 :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니체는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거대한 장애물을 ‘용(Dragon)’이라 불렀다. 이 용의 이름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Thou Shalt)”이다.

내 거실을 점령한 시아버지는 정확히 니체가 묘사한 그 거대한 용이었다. 그가 두른 황금 비늘은 ‘막대한 유산’과 ‘대를 잇는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 비늘은 내게 소리 없는 십계명을 강요했다.

“며느리는 순종해야 한다.” “가난한 예술가는 부자의 지갑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 “감히 어미 따위가 내 핏줄인 장손의 기를 죽여서는 안 된다.” “돈이 곧 진리이니, 통장이 얇은 자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이 압도적인 비늘의 광채 앞에서 나는, 그리고 내 남편은 감히 "아니오(No)"라고 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비겁한 낙타이다.

하지만 내가 기어이 망치를 들게 된 건, 그 용의 포효 때문이 아니었다. 용이 휩쓸고 지나간 뒤, 폐허가 된 거실에서 열 살 난 큰아들이 뱉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형의 로봇을 만지려던 동생을 거칠게 밀쳐내며, 아이는 할아버지가 했던 말투와 논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흉내 냈다.

“저리 가! 이건 할아버지가 나만 사준 거야. 너는 돈 없잖아. 엄마도 돈 없지? 할아버지가 돈 없는 사람은 힘도 없대. 내 말 들어!”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눈앞에 있는 건 내 아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작고 어린, 하지만 벌써부터 황금 비늘을 돋우기 시작한 ‘새끼 용’이었다. 섬뜩했다. 내가 참고 견디던 그 시간이, 내 아이의 몸속에 괴물의 알을 까놓고 있었다는 사실이.


4. 우상의 황혼 : 망치로 두드려본 용의 실체

나는 비로소 내 손에 들린 ‘엄마’라는 이름의 망치를 고쳐 쥐었다. 손잡이를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힘이 들어갔다. 나는 내 공포의 근원이었던 시아버지, 저 거대한 우상을 향해 니체가 가르쳐준 대로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저 노인은 정말 신(God)인가?’

쾅!

첫 번째 망치질에 돌아온 건 비늘의 파편이 아니라, 내 손목을 타고 찌릿하게 올라오는 극심한 통증이었다. 황금 비늘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견고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돈’과 ‘복종’으로 겹겹이 칠해진 그 갑옷은 나의 첫 일격에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오히려 용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감히? 당장 생활비가 끊겨도 그런 객기를 부릴 수 있겠느냐?" 그 비웃음 섞인 환청이 내 귓가를 때릴 때마다, 내 안의 낙타는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으려 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당장 다음 달의 카드값, 아이들의 학원비, 남편의 기죽은 어깨... 그 현실적인 공포가 다시금 나를 짓눌러왔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멈추면 내 아이는 영영 괴물의 먹잇감이 된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망치를 들어 올렸다.

쾅! 쾅!

한 번으로 안 되면 열 번, 열 번으로 안 되면 백 번을 두드렸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끝난 싸움이 아니었다. 밤이면 불안에 잠을 설치고, 낮이면 시아버지의 전화번호가 뜰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공포와 싸워야 했던 처절한 며칠간의 난타전이었다.

나는 이성으로 나의 두려움을 설득하고, 모성으로 나의 나약함을 베어내며, 지독하게 그 견고한 성벽을 두드렸다.

'돈이 없으면 우린 죽는가? 아니다.' '저분의 인정이 없으면 우리는 불행한가? 아니다.'

수없이 되묻고 수없이 내리치던 어느 순간, 찌지직- 하고 미세한 균열의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용의 비늘이 깨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절대적이라 믿었던 내 안의 공포심이 금이 가는 소리였다. 내가 두려워하지 않자, 비로소 그 거대해 보이던 황금 비늘의 광채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지막 일격을 가했을 때, 웅장한 천둥소리 대신 ‘텅-’ 하는 둔탁하고 공허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망치질에 너덜너덜해진 것은 용이 아니라 내 손바닥이었지만, 비늘이 벗겨진 용의 민낯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강자가 아니었다. 돈이라는 미끼를 흔들지 않으면 자식들이 자기를 찾아오지도 않을까 봐, 유산으로 위협하지 않으면 며느리가 고개를 숙이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외롭고 겁 많은 늙은이’ 일뿐이었다.

"우리 장손!"을 부르짖는 그 집착 또한 숭고한 사랑이 아니었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흔적(DNA)이 세상에서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생물학적 공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존경받는 어른이 아니라, 돈으로 애정을 구걸해야만 하는 가련한 채무자였다.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명제. 시아버지가 심어놓은 이 절대적인 비늘을 망치로 내리쳤다. 과연 그런가? 아이가 괴물이 되어 형제를 짓밟고 부모를 무시하는 부자가 되는 것, 그것이 행복인가?

답은 명확했다. 내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가난이 아니라, 내 아이가 ‘돈만 아는 괴물’로 자라나는 비극이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거대한 용은 죽었다. 황금 비늘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나는 결심했다. 이제 내 영토에서 저 가짜 신을 몰아내겠다고. 비록 남편이 물려받을 유산이 사라진다 해도, 나는 내 아이들을 지키는 ‘입법자’가 되기로 했다.

이제, 나약한 낙타는 죽고 사나운 사자가 포효할 시간이다.


5. 어미 사자의 포효 : "아니오(No)"라고 말하는 신성한 순간

내 결심을 시험이라도 하듯, 결전의 날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여느 때처럼 주말 방문을 마친 아버님이 현관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신발장 앞에서 아버님은 습관처럼 지갑을 여셨다. 그리고 빳빳한 오만 원권 뭉치를 꺼내더니, 당연하다는 듯 큰아이의 주머니에만 찔러 넣어주셨다.

"옛다, 우리 장손! 이걸로 맛있는 거 사 먹고, 학교 가서 기죽지 마라. 남자는 돈이 힘이야, 알지?"

옆에 서 있던 둘째와 막내가 부러움과 서러움이 뒤섞인 눈으로 그 광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큰아이는 의기양양하게 지폐 뭉치를 흔들며 동생들을 향해 "메롱" 하고 혀를 내밀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졌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내 아이들이 돈의 노예로, 차별의 희생양으로 길들여지는 꼴을 단 1초도 더 방관할 수 없었다. 내 안의 낙타가 죽고, 사자가 눈을 떴다.

나는 떨리는 손을 주먹 쥐고, 현관을 나서려는 아버님의 등 뒤에 대고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이 돈 거두어 주십시오."

현관 센서 등이 꺼지며 어둠이 내린 좁은 공간에 내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남편이 소스라치게 놀라 나를 쳐다봤고, 신발을 신던 아버님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셨다.

"뭐라고? 내가 내 손주 용돈 주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이 집에서 아이들은 모두 똑같습니다. 돈으로 애들 줄 세우지 마세요. 큰애만 챙기실 거면 앞으론 오지 마십시오."

"오지 마라?"

아버님의 얼굴이 붉은색을 넘어 흙빛으로 변했다. 남편이 사색이 되어 "여보, 미쳤어?" 하며 내 팔을 잡아끌었지만, 나는 그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남편의 안위가 아니라, 내 아이들의 영혼이었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당장 내일이라도 지원 끊어버릴 수 있어! 네 남편 회사에서 쫓겨나면 길바닥에 나앉을 텐데, 그래도 그 입 안 다물어?"

드디어 나왔다. 용의 필살기, '돈줄 끊기'. 하지만 나는 그 협박이 우습게 들렸다. 그래, 돈이 없으면 좀 불편하겠지. 하지만 내 새끼들이 괴물이 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나는 아버님의 눈을, 그 흔들리는 동공을 똑바로 응시하며 사자처럼 포효했다.

"네, 끊으십시오. 저희 굶어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 돈 때문에, 진심으로 아버님을 사랑해 줄 가족을 영영 잃게 되실 겁니다. 돈으로 손주를 사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아버님은 손을 부들부들 떠셨지만, 차마 내리치지는 못하셨다. 그동안 "네, 네"만 하던 며느리의 눈에서 서슬 퍼런 살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며느리의 반란이 아니라,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사자의 본능적인 위협이었다.

그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컸다. 그 "쾅" 소리와 함께, 나를 옥죄던 '착한 며느리'라는 노예 문서는 어미 사자의 발톱 아래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그것은 니체가 말한 '신성한 부정(Heiliges Nein)'이었다. 기존의 질서, 그 압도적인 "너는 해야 한다"는 명령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외치는 순간, 내 거실을 짓누르던 숨 막히는 공기는 사라지고 비로소 내 영토의 주권이 회복되었다.


6. 아모르 파티 : 나는 내 운명의 입법자다

전쟁의 여파는 거셌다. 아버님은 석 달간 발길을 끊으셨고, 남편은 자리와 유산이 날아갈까 봐 매일 밤 끙끙 앓았다. 남편의 등은 낙타의 혹이 두 개나 더 생긴 듯 무거워 보였다.

하지만 사자의 포효가 휩쓸고 간 내 영토에는 비로소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아이들에게서 일어났다. 할아버지라는 '절대 권력'이 사라지자, 집안의 공기는 정화되었다. 큰아이는 더 이상 동생들을 지배하려 들지 않았고, 아이들은 비로소 니체가 말한 '아이'의 단계처럼 순진무구하게 서로 뒹굴며 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석 달 뒤, 아버님이 다시 찾아오셨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예전처럼 "삐비빅" 하며 도어락을 제멋대로 해제하고 침입하는 소리 대신, 낯설고 조심스러운 벨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띵동-"

비밀번호를 뻔히 알고 계심에도 굳이 벨을 누르고 며느리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문밖에서 기다리는 그 짧은 침묵. 그것은 내 영토에 대한 침략이 아닌, 정중한 첫 번째 '노크'였다.

내가 문을 열어드리고 나서야 들어서는 그분의 손에는 여전히 비싼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었지만, 현관을 넘는 그분의 발걸음은 예전처럼 거실 바닥을 울리지 않았다.

"흠, 흠... 애들은 잘 있었냐?"

아버님은 습관처럼 큰아이를 찾으려 두리번거리셨지만, 예전처럼 "내 장손!"이라며 지갑부터 열지는 못하셨다. 대신 소파 구석에 앉아,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손주들을 바라보며 내 눈치를 살피셨다. 예전 같으면 내가 먼저 달려가 "아이고 아버님, 오셨어요!" 하며 과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띄웠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분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사과를 깎았다. '사각, 사각' 과일 깎는 소리만이 거실의 정적을 채웠다. 아버님은 그 침묵이 어색한지 연신 헛기침을 하셨지만, 감히 그 서늘한 공기를 깨고 훈수를 두거나 돈 이야기를 꺼내지는 못하셨다.

그분과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하지만 누구도 함부로 넘을 수 없는 단단한 유리벽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억지 미소로 그 벽을 허물지 않았고, 아버님 또한 그 벽 너머의 내 영토를 다시 침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불편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불쾌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만만한 존재로 여기지 않게 만드는 팽팽한 긴장감이자, 함부로 하대하거나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서로 섞이지 않고, 끈적하게 유착되지 않으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서늘하게 존재하는 이 감각. 이것이 바로, 이 숨 막히지만 정갈한 긴장감이야말로 니체가 그토록 강조했던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의 현장이었다.

우리는 이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뭉개진 반죽이 아니라, 서로의 예리한 모서리를 존중하며 거리를 둔 두 개의 독립된 인격체로 마주 앉아 있는 것이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 소란스럽고 피곤한 투쟁을 기꺼이 사랑하기로 했다. 이것이 나의 아모르 파티(Amor Fati)다.

시아버지라는 거대한 용과 맞서 싸우는 이 과정은 나를 고단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나를 ‘돈에 끌려다니는 며느리’에서 ‘아이들의 영혼을 지키고 내 가정의 질서를 세우는 입법자’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내 집은 이제 시아버지의 식민지가 아니다. 이곳은 황금 비늘의 유혹을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과 형제애라는 새로운 가치를 심어 가는 나만의 신성한 영토다.

용은 언제든 다시 불을 뿜으며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 손에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사랑, 그리고 낡은 신들을 언제든 내리칠 수 있는 니체의 망치가 단단히 들려 있으니까.

나는 며느리다. 아니, 나는 내 운명을 입법하는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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