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는 우리의 발걸음이 마침내 연꽃 위의 춤이 될때

진흙탕을 사랑한 초인, 텅 빈 배낭을 메고 순례의 길을 나서다

by 하노이별

1. 내 삶을 덮쳤던 진흙탕, 그 위에서 배운 춤의 스텝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다. 내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 불어닥쳤던 혹독한 통과의례들도, 어느덧 그 맹렬했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잔잔한 일상의 궤도 안으로 스며들었다.


굳게 닫혀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던 아이의 방문, 거실의 평온을 날카롭게 찢던 어머니의 전화벨 소리, 20년의 세월을 하루아침에 폐기 처분했던 실직의 아침, 그리고 밤마다 죽음의 공포로 목을 조여오던 갱년기의 펄펄 끓는 열기까지. 돌이켜보면 그것은 사방이 꽉 막힌 지옥이었고,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던 지독하고 끈적한 진흙탕이었다.


과거의 나는 그 축축한 늪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깨끗하고 안전한 마른땅으로 도망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라 믿었다. 하지만 니체의 망치로 낡은 우상들을 깨부수고, 부처의 웅장한 자비로 그 부서진 잔해들을 껴안으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저주하고 벗어나려 발버둥 쳤던 그 비릿한 진흙탕이야말로, 흔들리면서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고마운 밑거름이었음을 말이다.


불교에서는 진흙 속에서 피어나되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염상정, 處染常淨)을 가장 숭고한 깨달음의 상징으로 여긴다. 우리는 종종 맑고 향기로운 연꽃의 결과물만을 찬미하지만, 정작 그 꽃을 밀어 올린 것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캄캄하고 축축한 진흙의 힘이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할 때, 비극은 더 이상 나를 파괴하는 끔찍한 흉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나를 더 높은 차원의 긍정으로 도약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질척이는 현실 속에서 허우적대며 넘어질 듯 위태로웠던 나의 처절한 비틀거림. 타인의 잣대로 보면 그것은 흉하고 초라한 실패자의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눈물로 바닥을 짚고 겨우 다시 일어선 지금,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 수많은 비틀거림과 넘어짐이야말로, 언젠가 이 진흙탕 위에서 가장 가볍고 경쾌하게 날아오르기 위해 쉰 살의 내가 온몸으로 익혀야만 했던 치열한 '춤의 스텝'이었음을 말이다.


2. 구원자는 오지 않았다

지난 시간들을 가만히 돌이켜본다.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내 삶의 바깥을 향해 나를 구원해 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비겁하고 나약한 노예였다.


가정이 무너지고 아이가 방문을 굳게 걸어 잠갔을 때, 나는 그 곪은 상처를 내 손으로 찢고 직면할 용기가 없었다. 내 운명을 남의 손에 맡겨보려 수천만 원짜리 굿판을 벌이고, 입에 발린 위로를 파는 힐링 센터 주위를 유령처럼 배회했었다. 어머니의 질긴 올가미가 내 숨통을 조여올 때는 '착한 딸'이라는 껍데기 뒤로 숨어 안전을 구걸했고, 내 안의 펄펄 끓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아이를 억지로 사지로 내몰고도 '좋은 엄마'라는 도덕적 위안을 얻으려 발버둥 쳤다. 무엇보다, 타인에게 내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유능한 팀장'이라는 명함 한 장을 목숨처럼 쥐고 그것이 내 존재의 전부인 양 우상처럼 섬기며 살았다.


하지만 직장이 파쇄기에 갈려 나가고 갱년기의 폭력적인 열병이 내 육체를 덮쳤을 때, 내가 맹신했던 그 모든 도피처들은 한순간에 붕괴되었다. 텅 빈 거실에서 덜덜 떨며 하늘을 우러러보았지만, 캄캄한 천장에서 나를 구원해 줄 황금빛 동아줄 따위는 끝내 내려오지 않았다.


그 끔찍한 폐허의 밑바닥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은 세상의 불운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영원하길 바라고, 임시로 입은 역할의 옷을 내 진짜 살점이라 믿으며 꽉 움켜쥐고 있던 나의 지독한 '무지'와 '집착'이었음을 말이다. 구원자는 밖에서 오지 않는다. 낡은 우상들을 망치로 부수고, 꽉 쥔 손아귀를 풀어버린 빈손으로 기어이 잿더미 위에 홀로 서야만 비로소 진짜 삶이 시작된다는 서늘한 진실만이 남겨졌다.


3. 번뇌 즉 보리, 그리고 아모르 파티

대승불교는 내게 '번뇌가 곧 깨달음(보리)'이라는 파격적인 지혜를 가르쳐주었다. 흔히 깨달음이란 고통이 모두 사라진 깨끗한 상태라 오해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치열하고 역설적이다. 차갑고 딱딱한 얼음이 녹아야 비로소 흐르는 물이 되어 생명을 살리듯, 나를 까맣게 태우던 그 괴로움의 불길이야말로 지혜라는 꽃을 피워낼 유일한 장작이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를 덮쳤던 그 아픈 시간들, 냄새나는 진흙탕 같은 위기가 없었다면 나는 평생 남의 시선에 갇혀 억지웃음이나 짓는 가짜 꽃으로 시들어갔을 것이다. 수렁에 빠져 살려달라 소리치던 그 아우성은 낡은 껍질을 깨고 진짜 '나'로 태어나기 위해 온몸으로 앓아낸 눈물겨운 몸살이었다.


보살의 자비는 억지로 나를 깎아 남에게 베푸는 얄팍한 도덕적 희생이 아니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에 쫓기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를 정직하게 직시할 때, 비로소 인과의 질긴 사슬조차 가닿지 못하는 깊고 맑은 불성(佛性)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 텅 빈자리에서 도리어 뿜어져 나오는 것은 한 점 결핍 없는 절대적인 따뜻함과 충만함이다. 보살은 이 자명하고 유연한 지혜를 바탕으로 누군가를 억지로 뜯어고치려 하거나 맹목적으로 끌려다니는 대신, 내면에서 차고 넘치는 여유로 나와 네가 함께 온전해질 수 있는 길(자리이타, 自利利他)을 찾아낸다.


이러한 보살의 자비가 세상을 향해 넘쳐흐르는 다정한 충만함이라면, 내 안에서 맹렬하게 요동치는 생명력은 니체의 초인을 닮은 거친 야성으로 깨어난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팔자려니 하며 고통을 견디는 인내의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내 삶에 새겨진 모든 끔찍한 과오와 실패의 상흔들까지, 단 한 조각도 버릴 것 없는 필연적인 나의 조각으로 받아들이는 무시무시한 능동성이다. 내가 겪은 갱년기의 고통도, 실직의 아픔도, 그 비릿한 혈연의 진흙탕마저도 "이것이 나의 삶이었으며, 나는 이 운명을 단 한 점도 피하거나 고치고 싶지 않다"라고 선언하는 절대적인 긍정이다.


초인은 더 이상 외부의 조건이나 타인을 탓하며 자기 에너지를 소모하는 나약한 원한(르상티망)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남의 눈치를 보며 속세의 양심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검열하던 '노예의 도덕'을 망치로 때려 부수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제왕으로 거듭난다.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캄캄한 폐허 위에 홀로 설지라도, 그는 구원을 구걸하는 대신 자신의 발바닥에 닿은 차가운 대지를 딛고 일어나 스스로 빛을 내뿜는다.


이것은 삶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잔인한 운명일지라도 그것을 사랑해 버림으로써 기어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겠다는 의지다. 초인은 잿더미가 된 처참한 삶의 폐허 위에서 짐승처럼 포효한다. "이것이 나의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영원히 반복될지라도 나는 이 길을 다시 걷겠다는 그 서슬 퍼런 찬란한 긍정이야말로, 나를 주저앉히려는 모든 슬픔을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항체였다.


보살의 웅장한 자비와 초인의 야성적인 긍정이 내 영혼의 한복판에서 완벽하게 마주쳤을 때, 하늘을 우러러보며 구원을 구걸하던 비겁한 노예는 마침내 죽었다. 나의 찌질했던 밑바닥까지 온전히 긍정하는 초인의 용기와, 나와 타인의 고통을 둘로 보지 않는 보살의 넉넉함이 결합하여 기어이 나는 스스로를 구원해 낸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완벽한 주권자로 우뚝 서자, 징글징글했던 현실의 풍경도 거짓말처럼 다른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중력들은 도리어 나를 지탱하는 굳건한 대지가 되었고, 수렁에서 빠져나오려 허우적대며 지르던 비명은 이제 수렁 위에서 리듬을 타는 생의 찬가가 되었다. 내 손으로 나를 구원해 낸 그 투명하고 뜨거운 힘으로, 나는 이제 내 곁에서 함께 진흙탕을 구르며 비틀거리는 당신의 손을 조용히 맞잡는다. 희생과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차고 넘치는 이 경이로운 환희와 충만함을 기꺼이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4. 다시 배낭을 메고, 부처의 숨결이 머문 그곳으로

내 영혼을 옭아매던 수많은 밧줄을 스스로 끊어내고 맞이한 쉰 살의 봄날. 나는 이제 도서관에 가던 낡은 에코백 대신, 제법 커다란 배낭을 꺼내어 거실 바닥에 펼쳐놓는다.


얼마 뒤, 나는 홀가분해진 두 발로 15일간의 긴 인도 순례길에 오를 참이다. 나를 이 먼 길로 부른 것은 막연한 여행의 환상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시간 내내 진흙탕 속의 나를 건져 올리는 나침반이 되어주었던 위대한 스승, 부처의 발자취를 내 두 눈과 몸으로 직접 감각해 보고 싶은 간절한 이끌림 때문이다.


부처가 수많은 이들에게 법을 설했던 라지기르(Rajgir)의 영취산에 올라, 그 척박한 대지 위에 서서 내가 부수어낸 낡은 에고의 잔해들을 가만히 흩뿌려 주고 싶다. 그리고 6년간의 피 말리는 고행을 끝내고 마침내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던 보드가야(Bodh Gaya)로 향할 것이다. 장엄한 마하보디 사원의 짙푸른 보리수 아래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2,500년 전 대자유를 얻었던 부처의 서늘하고 자비로운 숨결을 내 호흡 안으로 깊이 들이마시고 싶다. 거창한 깨달음을 과시하거나 찬미하는 대신, 그저 징글징글한 진흙탕을 걸어온 고단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그 거룩한 그늘에 기대어 고요히 숨을 고를 것이다.


이 여행은 구원자를 찾아 나서는 연약한 도피도, 대단한 진리를 정복하러 떠나는 거창한 행진도 아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생의 다음 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가벼운 산책에 가깝다. 그저 진흙탕 속에서 온몸으로 비틀거리며 피워낸 이 작은 연꽃 한 송이를 부처님 전에 조용히 바치고 싶다. 배낭 속에 낡은 옷가지 몇 벌과 수첩, 펜을 주섬주섬 챙겨 넣는다.


5. 여전히 진흙탕 한복판에 서서, 마침내 연꽃 위의 춤이 될 때


"그래서, 니체와 부처를 만나고 나니 이제 도라도 좀 통하셨습니까?"


만약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책장 구석에서 니체의 불꽃같은 독설에 가슴이 베이고, 고요한 거실 바닥에서 부처의 서늘한 지혜에 무릎을 쳤다고 해서 내 삶이 하루아침에 잔잔한 호수처럼 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5년째 굳게 닫혀 있던 아이의 방문이 어느 날 갑자기 활짝 열리는 해피엔딩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여전히 낡은 부채의식을 자극하며 나에게 매달려 있고, 밤이면 갱년기의 열기가 어김없이 잠을 설치게 만든다. 나의 일상은 맑고 깨끗한 무균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이 푹푹 빠지고 퀴퀴한 냄새가 훅 끼쳐오는 질퍽하고 찐득한 진흙탕 한복판이다.


다가올 인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혹은 갠지스강의 시린 물안개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낯선 비틀거림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는 넘어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은 생 동안 수없이 또 다른 진흙탕을 만나 무릎이 깨지고 비틀거리겠지만, 그 상처투성이의 흔들림조차 내가 기꺼이 사랑하고 껴안아야 할 나의 찬란한 운명임을 아니까. 애초에 상처 하나 없는 완벽한 삶이란 없다는 걸 이제는 너무도 잘 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원래 그렇게 위태롭게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고, 그 불안한 발걸음조차 결국 나만의 춤을 완성하는 눈부신 과정일 테니까.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도 질척이는 늪 속에서 위태롭게 걷고 있는 당신, 비틀거리는 그 발걸음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그것은 길을 잃은 낙오자의 궤적이 아니라, 가장 더러운 진흙탕을 기어이 뚫고 올라와 단단한 연꽃 위를 딛고 서려는 치열하고도 숭고한 눈물겨운 안무다. 당신이 발을 딛고 선 그 징글징글한 현실은 이미 훌륭한 춤의 무대가 되고 있다.


삶이라는 눅눅한 밑바닥을 뚫고 올라온 연꽃 위에서, 나는 이제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춤을 춘다. 비틀거림이 춤이 된 그 자리에는 더 이상 타인에게 '증명해야 할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낡은 가치들을 망치로 부수어낸 폐허 위에서 무거운 의무와 죄책감의 갑옷을 벗어던지고, 오직 '지금 여기'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가볍게 도약할 뿐이다.


이것은 모든 상처를 온전한 내 것으로 품어 안는 보살의 깊은 수용이자, 과거를 망각하고 현재를 유희로 바꾸는 어린아이의 찬란한 창조이다.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불안이라는 중력을 끊어낸 자가 누리는 이 압도적인 자유야말로, 내가 진흙탕 속을 굴러 기어이 얻어낸 가장 눈부신 전리품이다. 쉰 살의 나는 비로소 세상의 배경이 아닌, 내 삶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으로 가장 당당하게 우뚝 섰다.


인도로 떠날 배낭의 지퍼를 굳게 채운다. 비틀거리는 우리의 발걸음이 마침내 환한 연꽃 위의 눈부신 춤이 되는 그 찬란한 순간, 나의 쉰 살은 세상에서 가장 맹렬하고 아름다운 축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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