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터 한트케 -
어머니의 삶을 글로 표현해야만 했던 저자 페터 한트케. 자식이 엄마의 일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싶다만 '자살'이라는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덜 주관적이 될 수 있는 것이 글이 아닐까 싶다. 내가 힘들 때 글을 쓰면서 나를 바라보려 애썼듯이 저자도 애도 기간을 자신의 글로 채우며 살아가야만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지 않았을까.
어떤 형태로든 가족의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는 삶의 한 편을 도려내야 하는 일이다. 남은 자는 떠나간 이와 함께 했던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보다 주고받았던 아팠던 일이 더 커다란 슬픔으로 덮친다. 망자와 주고받은 말과 일들은 끔찍할 정도로 현실이 되고 생각이 되어 내 주위를 맴돈다. 눈물도 흐르지 않을 정도로 우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조금씩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오빠를 보냈고, 딸을 보냈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면서 본 나를 보면 그렇다.
내가 어릴 때 동네에서 자살 사건이 있었다. 윗동네의 커다란 저수지에서 수면 위에 떠 한 사람을 발견했고 그분은 엄마의 친구였고, 오빠의 친구 엄마였다. 세 남매를 두고 떠난 것이다. 그분은 혼자서는 도저히 자식들을 키울 수 없었는지 병으로 죽은 남편의 뒤를 따랐다. 세 남매는 얼마 안 가 어디론가 떠났고, 그 집은 한참 비어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세 남매 중 오빠 친구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에 있는 좋은 학교로 갔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다. 살면 살아진다는 말보다 잘 살아냈다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잊히지 않고 나에게 한 번씩 떠오르는 사건이었다. 엄마가 자식을 두고 어떻게 죽을 용기가 생겼을까? 살아갈 막막함보다 자식들이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죽을 용기로 살아주어야 하는 것이 엄마가 아닐까 하면서.
어쩌면 저자의 어머니가 살아 낸 세월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엄마로서 살아냈기를 강요하는지도 모르겠다. 배우 이선균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자식을 둘이나 둔 아버지가 죽을 수가 있나 싶어 화가 났다. 사람은 잘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잘못한 만큼 받아야 하는 대가가 있다면 치르내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낸 사람들 대부분이 자살하고픈 충동을 이기려 스스로와 싸웠다고 하지 않는가.
책은 두 편으로 되어 있다. 어머니의 이야기인 [소망 없는 불행]과 저자 자신이 딸을 혼자 키우는 아버지로 살아가는 [아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객관화가 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는 길인 것 같다. 가족의 이야기지만 상대로부터 가장 멀리 설 수 있어야 보편성 있는 글이 되지 않을까? 나 자신도 가족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생각이 있다. 너무 가까운 사이이지만 가장 멀리 있을 수 있는 관계도 가족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