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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님이 Mar 15. 2024

그녀의 연인에게 1/2

세상에서 가장 공감이 안되고 그저 한심하다 생각되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영화와 소설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보며 행복하기를 바라고 혼자 웃으면서 울고 있는 그런 답답한 이들이다. 그런데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되어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던 그들의 안부가 요즘 들어 부쩍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1년쯤 전, 결혼에 대해 이제 막 관심을 가지게 된 5살의 달님이에게 누구와 결혼할 건지 물어보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 나는 아빠랑 결혼할 거야.


라고 대답했고 나는 그때마다 기쁨을 애써 감추며 달님이의 의지를 재차 확인했다.


— 아빠는 엄마랑 결혼했는데?


— 그럼 우리 셋이 결혼하는 거야.


모든 딸을 가진 아빠들에게 있어 가장 바람직한 대답을 주었던 이때까지만 해도, 다른 딸 아빠에게 나는 ‘달님이는 아직도 아빠래요’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만은 화를 부르기 마련, 내가 오랜 시간 검토를 거듭해 온 예측모델과는 다르게 이 행복한 시간은 너무나도 짧게 끝났다.


— 아빠, 나는 지금 우빈이와 지호 중에서 누구랑 결혼할지 고민 중이야.


— 그럼 아빠는?


— 아 맞다. 아빠까지 해서 셋 중에 고민 중이야.


— 아빠랑 결혼한다며.


— 응, 근데 아빠는 내가 크면 할아버지가 될 거잖아. 그래서 조금 고민 돼.


— 아빠는 할아버지 안된다니까.


—  근데 일단 아빠는 엄마랑 결혼했고, 아빠의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었잖아. 모든 사람은 이렇게 나이를 먹으면 할아버지가 되지.


— 그래도 아빠는 절대 할아버지 안돼. 근데 우빈이랑 지호랑은 왜 결혼하려고 하는데?   


— 음.. 우빈이는 친절하게 잘해 줘. 그런데 좀 장난꾸러기야. 선생님 말씀을 잘 안 듣고 장난을 쳐. 수업시간에 돌아다니고.


— 어우, 그건 절대 안 돼. 선생님 말씀 안 듣는 남자는 별로야.  


— 그치? 나도 좀 별로인 것 같긴 해. 그런데 지호는 달리기를 잘해.


— 달님아, 아빠 달리기 엄청 빨라. 지호는 상대도 안돼.


— 아니야. 지호 진짜 빨라. 아빠가 못 이길걸?


— 아니, 나 참, 아빠가 이겨. 정말이야.


나는 지호와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래도 나중에 결혼하게 될 남자는 이야기 속 왕자님처럼 정의롭고 달님이를 지켜줄 수 있도록 강해야 한다는 나의 당부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 같아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누구와 결혼한다고 할지 그 결정을 불안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 하루는 달님이가 별님이에게 결혼한 두 친구사이의 대화라는 설정의 역할놀이를 제안한 적이 있다.  


— 달님아 안녕? 잘 지냈어?


— 친구야 안녕? 뭐 해?


— 응, 나는 남편이 아직 퇴근을 안 해서 기다리고 있어.


— 몇 시에 오는데?


— 10시 반? 11시?


— 그렇구나. 나도 남편을 기다리고 있어.


— 아, 그래? 너희 남편도 일하느라 늦는 거야?


— 아니, 소풍 갔어.


— 소풍 가서 아직도 안 들어왔어? 몇 시에 온대?


— 음.. 세 시?


— 뭐라고? 일 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놀러 가서 새벽 세 시에 온다고?


이때 별님이는 진짜로 화가 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퇴근 후에 전해 들은 나도 이 대목에서 진짜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 응, 친구들이랑 같이 갔는데, 세 시에 온대.


— 좀 너무 늦는 것 같은데… 그럼 먼저 자고 있어야겠네.


— 아니야, 나 밥 해줘야 해서 못 자.


별님이는 여기에서 완전히 폭발했고, 나도 똑같이 그랬다.  


— 뭐? 아니 그, 남편.. 뭔데? 소풍 가서 놀다 3시에 오는 남편 밥을 왜 차려 줘? 친구야 얼른 그냥 자.


— 아니야. 남편 밥 차려 줘야 해.


— 하아.. 그럼 밥을 해놓고 알아서 차려먹으라고 하면 되지.


— 개미가 먹으면 어떡해.


— 개미가 못 먹게 뚜껑을 잘 덮어놓으면 괜찮아.


— 그럴까? 그래 알았어. 그럼 우리 같이 자자 친구야.  


그날 밤 별님이와 나는 실체도 없는 달님이의 남편을 씩씩대며 한참 동안 성토했다. 그리고 밤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위해 밥을 차려주려 하는 달님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생각이 기특해서 감탄하고 감동했다. 달님이는 결혼해서도 잘 살 것 같다는 생각은 너무 이른 것일까.


그런데 이렇게 얼마동안을 결혼이라는 주제에 심취해 있던 달님이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안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달님이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던 것 같다.


— 아빠, 나 우빈이랑 지호랑 결혼 안 해.


— 응? 왜? 생각이 바뀌었어?


— 음, 우빈이는 엄마랑 산대.


— 아, 그래? 지호는?


— 지호는 결혼 안 할 거래.


— 그렇구나. 그럼 달님이는 어떡해?


— 엄마 아빠랑 같이 살면 되지 뭐.


강력한 경쟁자 둘이 비혼을 선언하는 바람에 생각보다 빨리 달님이는 결혼에 대한 관심이 흐릿해졌다. 이렇게 직접 나서지 않고 너무나 쉽게 경쟁자들을 물리친 나는, 비로소 나만이 달님이의 애정을 독차지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자들은 애초에 상대도 되지 않는 엄청난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엄마, 별님이다.


* 7화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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