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호철 Sep 11. 2024

앎의 아이러니 (1)

부조리한 삶

삶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이 진실을 평소엔 거의 의식하지 못하다가, 누군가 화제에 올리면 무슨 소리냐며 부정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세상엔 여전히 불평등, 불공평 그리고 부정의가 만연해 있다. 물론 삶을 개선하려는 우리의 몸부림은 계속되겠지만, 세상 속 부조리가 해소될 가능성이 있을까 숙고해봐야 한다. 어쩌면 부조리는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삶의 조건일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부조리에 대해 알베르 까뮈만큼 제대로 알려준 지식인은 없었다. 우선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우리가 어떤 불확실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 바로 나의 것인 이 마음까지도 내게는 영원히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확실성과 이 확실성에 내가 부여하고자 하는 내용 사이의 구렁은 결코 메울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이방인일 것이다.”(1) 즉 사람이란 동물은 내면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간극을 지녔고, 이것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음속 틈을 메우기 위해 줄기차게 도전하며, 언젠가 이방인에서 벗어나리란 희망을 결코 내려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엄연한 불확실성과 다투는 와중에 부조리는 생겨난다. “(…) 이 세계는 부조리한 것이다라고 나는 말했지만 그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었다. 세계가 그 자체에 있어 합리적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러나 부조리란 곧 이 비합리적인 것과 대결하는 것이며,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호소하는 명석함에 대한 격렬한 욕망에 대결하는 것이다. 부조리는 이 세계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인간에 의존한다. (…)”(2) 사라지지 않는 불확실성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부조리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까뮈는 우리 삶에 부조리가 ‘명석함에 대한 격렬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분명히 했다. 즉 사람은 부조리를 극복할 수 없다는 현실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이 지닌 어떤 본능, 즉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 때문이다. 이 본능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애 내내 세상이나 자신을 끊임없이 탐구하도록 이끄며, 까뮈가 격렬할 욕망이라 표현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에게선 이 욕망이 상상력과 결합하여 앎으로 탄생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생존하는 데 있어 앎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무기다. 설사 그로 인해 부조리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앎이 도대체 뭐길래 생존을 넘어 사람을 지구의 정복자로 만들어 준 걸까? 까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언어의 장난과 논리의 곡예가 어떤 것이든 간에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통일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깊은 욕구는 그 가장 발전된 기능에 있어서까지도 우주 앞에서의 인간의 무의식적인 감정과 합류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친근함에 대한 요구이며 명석함에 대한 갈망인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며, 인간의 도장을 찍는 것이다.”(3) 사람은 주변에 있는 모든 걸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앎은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 노력은 때로 천재지변이나 극심한 전염병 그리고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가곤 했다. 한 문명이 무너지면 다른 문명이 생겨나며 역사에 앎은 쌓였고, 축적의 맨 꼭대기에 현대문명과, 이 문명을 신뢰하는 현대인이 있다. 


현대인으로서 사람들은 과거 누구보다 현대문명을 일군 앎을 신뢰한다. 현대인이란 정체성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전에 없던 아주 독특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즉 현대인은 지금보다 삶이 나아질 것이며 모든 어려움은 언젠가 앎에 의해 극복되리라는, ‘완전한 지식에 의한 자유’란 신념을 지녔던 것이다. 이 신념은 사람들 내면에 단순한 믿음을 넘어 곧 다가올 완벽한 미래로 각인되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현대인으로 살게 된 건 모두 현대문명에 생겨난 신념과 다른 문명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성공 덕분이고, 이 모든 일은 배후에 앎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고 현대사회가 합리적인 세상으로 거듭난 건 결코 아니다. 이 세상에도 불확실성이 넘쳐나고, 사람들은 삶에서 부조리를 느낀다. 다만 이 문명이 다른 문명과 결정적으로 다른 건, 부조리를 언젠가 넘어설 수 있다고 선전한다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인정받는 직업 중 하나인 과학자나 기업인은 이 문명이야말로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리라 확신한다. 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과업에 참여할수록 영광의 순간은 더 빨리 오리라 장담한다. 사람들은 과학자나 기업인이 선동하는 미래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다. 자신 삶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음에도 말이다.


현대문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탐욕적으로 앎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 문명은 눈에 띄는 거의 모든 앎을 손에 넣으려 했고, 덕분에 막대한 양의 앎을 손아귀에 거머쥘 수 있었다. 말하자면 앎의 총량이 현대문명에 이르러 다른 문명은 꿈도 못 꿀 정도로 늘어났다. 물론 아직까지 각고의 노력에도 밝혀내지 못한 영역이 있는데,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가 대표적인 예다. 이에 관하여 과학자가 아는 건, 우주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원소 물질은 고작해야 약 5%이며 나머지는 암흑 물질 약 27%와 암흑 에너지 약 68%가 차지하며, 암흑 물질이나 암흑 에너지가 은하 회전이나 우주 팽창과 관계한다는 사실 정도다. 여기서 말하는 암흑이란 ‘모른다’의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처럼 지금껏 알아낸 것보다 더 광대한 무지의 영역이 펼쳐져 있지만, 현대인으로서 사람들은 앎을 캐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이가림 옮김, 문예출판사, 1997, 30쪽.

2. 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이가림 옮김, 문예출판사, 1997, 33쪽. 

3. 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이가림 옮김, 문예출판사, 1997, 27-28쪽.

이전 08화 세상을 다시 보기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