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호철 Sep 06. 2024

세상을 다시 보기 (7)

새로운 종교

현대문명이 이룩한 성공은 가히 눈부셨으며, 이것은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그리고 자본주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과업이다. 허나 현대문명은 무분별한 환경 착취에 따른 자원 고갈과 더불어 심화하는 빈부격차를 해소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선명해지는 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든 폐해를 유발한 원인으로 신념을 의심할 시점에 이른 게 아닐까. 과연 사람들은 신념을 받아들여 무엇을 원했는가? 존 그레이의 말을 들어보자. 


“(…) 선택의 자유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진 욕구인지는 몰라도 가장 강한 욕구이지는 않다. 인간이 선택의 자유보다 먼저 원할 법한 다른 것들(가령 음식이나 주거)이 많다는 점에서 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남들이야 원하는 대로 사는 자유를 누리게 두건 어쩌건, 자기 자신은 자유 없이 사는 편이 더 행복하다고 여길 사람들이 언제나 많이 있으리라는 점이다.”(18) 


여기서 가정을 도입해 보자. 어쩌면 사람들이 진정으로 얻고자 했던 건 ‘선택으로부터 자유’ 아니었을까. 과거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 이 자유를 얻고자 했다. 사람들은 대개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원했고, 그게 아니라면 내세에서 구원을, 하다못해 일상에서 안식이라도 찾고자 했다. 종교가 딱히 삶에 획기적인 영달을 가져다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또 과거 어떤 문명도 구성원에게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진 않았다. 현대문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이전 문명과 확연히 달랐다. 이 문명은 과거 지배자만 가졌던 풍요와 안정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사하리라 장담하였다. 사람들 눈에 현대문명은, 종교가 말로만 떠들던 ‘선택으로부터 자유’를 정말로 실현할 것처럼 비쳤다. 그러므로 가정에 의한다면 현대문명은 새로운 종교이며, 현대사회는 이 종교를 신봉하는 집단이며, 현대인은 이 종교의 신도이다. 


우리는 종교가 세상을 지배했던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사는 중이다. 다만 현대문명은 종교가 겪지 않아도 될 문제에 직면했다. 종교가 약속했던 구원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내세가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른다. 설사 사람들은 현세에 어떤 구원도 체험하지 못할지라도, 내세엔 잘 될 거라 믿으며 안정을 얻는다. 그렇게 종교는 내면을 치유하고, 신앙으로 결집하여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반면 현대문명은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줄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내 삶에 이루어진다면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풍요와 안정은 오직 특권층에게만 실현되었다. 나머지는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삶을 살아낸다. 이들은 현대인으로서 마땅한 안정을 누리긴커녕, 매일 불안에 떠는 신세다.


현대문명은 기묘한 종교다.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지식에 의한 자유라는, 이전엔 결코 나올 수 없었던 신념을 전파했다. 이로써 현대문명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미래를 열어젖혔다.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에 귀의하며 드디어 내 삶에 풍요와 안정을 누릴 것이라 환호했다. 그 결과 현대문명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끌어안았다. 이 과제는, 다른 종교가 약속했던 내세적 구원보다 훨씬 어렵고 힘겨운 것임에 틀림없다. 과연 현대문명은 지난날 이뤘던 성공처럼 21세기에도 영광을 반복할 수 있을까?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좀 더 지켜볼 일이다.




18. 존 그레이, 《꼭두각시의 영혼》, 김승진 옮김, 이후, 2016, 17쪽.

이전 07화 세상을 다시 보기 (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