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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호철 Jun 15. 2022

의식의 등장 (1)

사람의 모순

  ‘도대체 사람은 왜 있는가’라는 여전히 답할 수 없는 의문이 있다. 이 의문은 다음과 같이 물어볼 수도 있다. 사람은 왜 태어나는가? 왜 삶을 기뻐하거나 슬퍼하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가? 왜 사람은 삶과 죽음을 현실에서 반복하는가? 왜 어떤 삶은 가장 훌륭하고 명예롭다고 여겨지는가? 반면에 또 어떤 삶은 비참하거나 절망적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이러저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사람은 왜 사는가? 우리가 이 같은 질문들에 정말로 답을 찾았던 적은 없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사람이 왜 있는지, 그리고 왜 살고 있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여기서 의문은 우리 인식능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우리는 의문이 제시하는 인식의 최전선에서 사람의 능력으로 결코 답하지 못할 영역을 마주한다. 동시에 우리는 의문에서 사람을 정의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배우게 된다. 사람의 말로는 의문 너머를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의문에 침묵하거나 아니면 다른 질문들에만 열성적으로 대답한다. 아마도 사람이 내뱉는 모든 말은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하는 최초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말을 통해 진리를 발견한 척 노력한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노력을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왔지만, 그럼에도 말이 결코 진리로써 되돌아왔던 적은 없다.


  의문은 또다른 측면에서 답을 해주지 않는다. 우리의 희망과 달리, 삶은 어떤 가치도 내재하고 있지 않는다. 즉 우리의 삶은 진실한 의미를 담보하거나 원대한 목적을 향해있지 않다. 만약 우리가 답을 찾을 수 있었다면 삶의 존재나 가치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에 대한 답이 될 것이며, 동시에 그 답만이 유일한 가치를 지녔을 것이다. 답이 마침내 나타난다면 위 의문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답은 온 세계를 채울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삶에서 어떤 고민과 방황도 하지 않은 채 한 평생을 안온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답에는 사람과 관련한 모든 해설이 포함되어 있다. 해설서는 고통을 느낄 만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답을 알려주어 우리가 고통을 해소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런 답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엄혹한 현실 앞에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대응했을까? 우리 자신은 사람으로서 가지게 된 본연의 능력에 충실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에서 조그마한 의미나 실낱같은 목적을 찾고, 이것으로부터 희망을 캐내어 애꿎은 보람과 지난(至難)한 만족을 느끼려 했다. 누군가는 허상에서 발굴한 삶의 의미나 목적을 과대포장하거나 심지어 신성시 여겼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삶에서 의미나 목적이 무가치 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처럼 믿고 행동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무리 의미를 축적하고 목적을 높이 잡더라도, 그들의 노력은 의문에 의해 깨어난 현실 앞에서 언제나 흔들렸다. 또 자신의 삶에 의미나 목적이 없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절망하여 패배하거나, 그런 절망에 잠시 휘청거렸음에도 다시 일어나 다른 의미나 목적을 쌓아올렸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이 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완전한 무감각으로 의문을 부정한 채 허상을 숭배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삶은 계속됐다.


  사실 의문은 생애 전 과정을 통해 우리를 허상에서 깨어나도록 하며, 이런 상황은 세대와 시대에 걸쳐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삶의 길목마다 마주치는 의문과 그로 인한 놀람 때문에 삶에서 온갖 고뇌와 번민을 맛본다. 이러한 의문의 깨우침에도 불구하고, 허상은 여전히 삶 속에 있다. 오히려 사람들은 때때로 의문을 잊고 지내는 반면, 허상은 언제나 우리 삶 전체를 온전히 지배한다.


  그런데 어느 시대든 허상의 논리적 귀결은 의문에 대한 특수한 형태의 대답이었다. 물론 이러한 대답은 의문을 전혀 해소하지 못하지만,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여기서 허상의 출발점이 이러저러한 의문임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허상은 인식 한계의 최전선을 넘지 않은 채 의문과 공존한다. 의문과 허상의 공존이 야기한 삶의 경험은 선사와 역사라는 이름 아래 여러 흔적과 기록으로 현실에 퇴적하였다. 거기서 우리는 삶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가득 차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정확히 의문과 허상이 만들어내는 경계선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경계선에서 겪는 경험들을 뭉뚱그려 말한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고통이다. 과연 어느 누가 인생을 살면서 고통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는 경계선이 만들어내는 삶을 헤쳐 나오며 온갖 고통을 이겨낸 끝에 죽음에 다다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문으로부터 생겨난 놀람과 허상이 쌓아 올린 대답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생겨난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삶으로써 발견할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는가?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왜 고통을 느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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