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명절마다 음식 준비하는 일을 도왔다. 큰어머니와 우리 엄마, 작은 어머니들까지, 일할 사람은 많았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돕겠다고 했고, 하나하나 쉬운 것부터 배우다 보니 중학생쯤 되어서는 나도 한몫을 하고 있게 되었다. 어릴 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대화에 가끔씩 끼어들어도 명절 음식을 튀겨내고, 굽고, 찌는 동안에는 어린애라며 뭐라 하지 않고 일원처럼 받아들여지는 것도 좋았고, 힘들면 언제든 그만두고 놀러 갈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그때 나의 노동은 함께해서 좋은 자발적 노동이었다.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설 명절을 치렀다. 우리 집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차례 음식들을 시어머니와 함께 준비하고, ‘너는 집이 가까우니 하루 더 자고 가거라’ 하는 말을 당연하게 따르며, 명절 오후부터 4명의 시누네 가족들이 도착할 때마다 상을 차려내고 치우고, 차려내고 치우기를 밤까지 쉴 새 없이 해 내고, 그다음 날 친정에 들렀다. 어머니는 ‘그래, 시어른들이 원하는 거면 늦게 와도 우린 괜찮다. 가족이 화목한 게 중요하지. 조금 희생하더라도, 몸이 고생하고 마음이 편한 게 더 좋은 거란다.’라고 하셨다. 반박할 수 없지만, 내 속에 뭔가가 울컥하고 꿈틀댔다. 그날 집에 돌아온 나는, 난방을 한 번도 넣은 적 없는 작은방에 이불을 질질 끌고 들어가 혼자 자겠다고 고집을 피우다 엉엉 울었다. 남편은 영문을 모르면서 내게 미안해했다.
나는 중학교 시절 명절에 한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종류의 노동을 했지만 분명 둘은 같지 않았다. 뭐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없으나 이번의 노동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합리하다. 부조리하다.
그러나 한국의 모든 며느리들이 매 명절마다 해 내는 일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순간, 내가 이기적인 사람, 되바라진 여자가 될 것 또한 알았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된 여자라면, 희생하고 헌신하고 인내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남자도, 여자도, 이 사회 전체도 그것을 바란다면 몸부림쳐봐야 개인은 부서질 뿐이다. 이런 경우는 필시 제도가 문제이다. 문화의 고정관념과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문제이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할머니는 ‘니 결혼할 때쯤이면 제사도 없어지고, 이런 거, 여자를 힘들게 한 것들 다 없어질 게야’라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제사를 없애지 않았고,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이제 큰아버지 댁에 모여 명절음식을 차린다. 시어머니는 ‘내가 죽고 나면 냉수만 떠 놓든, 절에 맡기든, 없애든 네 좋을 대로 해라.’라고 하면서 절대 제사를 물려주지 않는다. 내가 “정말로 냉수만 떠 놔도 돼요?”라고 되물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시누들은 제사의 고달픔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없애자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나는 내 대에서 이 악습의 고리는 끊을 것이다. 현재 끊어내지 않는 것은, 주관자인 어머님이 그걸 원치 않아서이다. 죽은 사람을 굳이 구시대적인 절차로 기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살아있는 그녀들의 다정함은 사랑한다. 60년이란 세월을 가사노동과 들일과 자식에게 쏟아붓고도 여전히 된장, 고추장, 깻잎 한 장이라도 더 주고 싶어 하는 어머님과, 희생적인 사고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마음 따뜻한 시누이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문제를 직시하고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기 조심스러워한다. 관습은 그것을 거부하는 자를 집단에서 쫓아내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우스운 것은, 결혼 첫 해의 내게 남편은 나를 이해한다고 했으나 오늘 제사를 지내고 돌아온 남편은 자기가 제사를 지낼 테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걸 없앨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자기는 정말로 제사를 계속 지내고 싶고 변형된 형태라도 이걸 유지하고 싶단다.
나는 제도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부조리를 없애고 싶은 것인데, 그는 '네가 귀찮아서 안 하려는 것'이라고 문제의 본질을 전혀 다르게 보고 있다. 누군가가 그걸 대신 한다고 해서 그 부조리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제사라는 행위 자체가 혼자만 기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이길 강요하는 절차적 행위들은 그것에 참여 하지 않는 사람을 배척한다. 모두가 원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배척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혹은 미신적인 천벌이 두려워서 '원하는 척' 을 한다.
망자를 기리는 것은 제사 없이 1초 만에도 가능하다. 생각은 언제나 죽은 자를 자기 마음 속 자리에 불러낼 수 있다. 국가적인 기념일처럼 매년 망자를 기리는 행사를 거창하게 해야만 할 이유가 하등 없다. 365일 중 365일 모두 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굳이 제사를 유지해야 할까? 내가 지내는데, 내 며느리가 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눈치를 안 보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상하겠지? 이런 경우는 필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제도가 문제인거다. 악습은 아닐지 몰라도, 이제는 맞지 않는 옷과 같은 인습이 된 것은 사실이다.
다민족, 다언어 문화, 낮은 교육열, 여성에 대한 차별적 교리를 가진 종교, 강대국의 개입,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아프간의 비극은 오늘날까지도 진행 중이다. 악습이라 불러도 무방할 차별, 특정 계층이나 성별에 대해 당연하게 희생을 강요하는 문화는 낡은 문화이다. 그 부조리함을 자각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야만 조금씩 바뀔 수 있는.
아프간에는 더 많은 라일라와 타리크들이 필요하다.
제사 문화의 부조리함에 대해 분노하는 한국의 며느리들만큼이나 더 많은 라일라와 타리크들이.
그런데 부조리함에 분노나 불평은 하면서 정작 제사는 안 없애는 며느리들이 정말 많은 걸 보면, 부조리를 자각하는 것과 그것을 바꾸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