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미안해. 그 사람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나는 너무 무서워. 정말 미안하다." 이렇게 말하며 언니는 확인서를 써 줄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아파트를 시끄럽게 했던 경비 업체 선정 문제 덕분에, 그 일로 쫓겨난 입대의 회장이 누명을 씌워 나와 다른 입주민들을 고소했다는 걸 모르는 아파트 주민은 거의 없었다.
'참 뻔뻔하지, 자식 키우는 놈이 저렇게까지 추잡스러워, 저러고 정치한다고 하는 걸 보면 쯧쯧…….'
쫒겨나면서 너무 창피스러웠나보다 하던 사람들도 경찰 조사가 몇 번이고 진행되고, 일부 항목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가 성립한다며 내게 벌금형이 선고되자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재판을 하게 되면 네가 너무 힘들어지잖아. 그냥 벌금 내고 말아. 그깟 거 얼마 된다고.', '사과하면 취하해 준다잖아. 딴사람들도 사실 그대로 말한 것뿐이지만 사과해서 취하받았는데, 너도 사과하면 안 되니.', '이게 너만 고생하는 건 줄 아니? 너희 애들, 남편 다 힘들어지는 거야. 남편은 뭐라 안 해?'.
부모님조차도 '김 서방은 뭐라고 하니'라고 먼저 물었다. 조사가 들어가면서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내게 '남편'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고, ‘네가 옳은 것은 알지만..…….’ 하고 시작해 아주 약간만 비굴해지라 했다.
함께 정의로운 목소리를 낼 때는 그들 모두가 곁에 있었다. 무엇이 선하고, 옳은 것인지 모두가 다 알고 있을 때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일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그 말을 하기 위해 가진 무언가를 내놓아야 할 순간이 되자 순식간에 바깥쪽의 사람들부터 사라졌고 어느 순간, '네가 글을 너무 세게 썼어. 굳이 그렇게 나서야 했을까?', '오지랖 넓은 사람이 결국 피해 보는 거지 뭐.'라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나는 나서기 좋아하는 기 센 여자, 티끌만 한 정의를 지키겠다고 온 집구석을 들쑤셔놓은 여자가 되어있었다. 어떤 이들은 내게 관행적인 일에 딴죽을 걸었다거나, 입대의 회장 하면서 그 정도 돈은 받아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나를 고소한 사람만큼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기업 비리를 폭로한 것도 아니지만, 이런 티끌만 한 문제에서도 사람들이 비굴함의 인플레이션(소설의 주인공인 토마시가 체코의 병원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을 경험한다는 사실, 자기들에게 작은 피해라도 생길까 몸을 사리고 부조리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자가 회장 직에 있을 때 수십 명의 입주민이 홈페이지에 그의 행태를 비판했고, 내가 몰랐던 갑질이나 향응에 대한 정보도 올라왔다. 회장이 입찰에 관여했던 사실이 폭로되는 자리에는 100명이 넘는 입주민들이 참관하여 분개했다. 하지만 법정에는 나 혼자 서 있었고,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곁을 지켰을 뿐이다.
경찰 조사를 대여섯 시간 받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던 길, 변호사에게 거금을 주고 사실을 날조해 거짓말로 고소한 놈의 야비함에 치를 떨었고 그 장단에 어쩔 수 없이 놀아나는 것도 화가 났다. '이게 뭐라고, 내가 직업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벌금이야 내면 그만인데, 다툴 가치가 있는 일이냐'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보다 더 거친 글을 쓰고, 앞장서서 회장을 욕했던 남자들이 고소 이후 잠잠해지고, 어떤 이는 ‘내가 벌금 내줄 테니 그냥 내고 그만둬요. 싸워봤자 자기만 손해예요.’라는 친절함까지 보이자, 내 속에서 뭔가가 더 터져버린 것이다. 벌금 50만 원과 진실을 왜곡한 사과 한 번으로 평온을 누리는 것이 과연 중요한가? 그래, 돈 많은 회장은 저렇게 비싼 변호사를 고용해서 온갖 거짓을 꾸며내어 고소한 거니 내가 질 수도 있지, 하지만 진다고 해도 나까지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다. 주변의 사람들이 내게 처세술에 대한 강연을 하면 할수록 그런 걸 내가 할 수 없으리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건, 힘들지만 피할 수 없기에 치러야 하는, 나의 ‘Es muss sein’이었다.
10년 전의 나는 인생의 깊이를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로 이 책을 읽었지만, 티끌만 한 재판을 겪은 10년 후의 나는 이 책을 정의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정의로움의 허망함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작가는 모든 등장인물들의 키치를 박살 내는 것을 즐기면서도 삶 자체를 냉소적으로 결론 내진 않았고,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의미를 무겁게 만들지 않았다.
공산주의 소련 치하의 체코에서 사소한 글 한 편으로 자기 내면의 정의가 시험대에 올라간 토마시. 그는 누구를 이끌거나 선동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신념대로 살다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의 내밀한 부분에 대한 관음적 소유욕은 그에게 과연 신념이란 것이 있었나 의심하게 만들 만큼 가볍고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이와 다르게 지식인의 이상을 추구했으나 좌익의 대장정 키치에 매몰된 프란츠. 그는 사랑했던 사비나의 본질도 알 수 없었고, 자신의 이상과 가장 동떨어진 죽음을 맞는다. 테레자, 그녀가 정의감에 불타서 소련의 만행을 폭로하기 위해 찍은 사진들이 결과적으로는 소련에 대한 반체제인사를 색출하기 좋게 만든 증거가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거리로 쏟아져 나와 소련에 반대하는 행진을 한 체코 여자들이 일상에서 마주쳤을 땐 우산 공간 한 줌도 양보하지 않는 심술 맞은 여자들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녀의 키치는 깨어졌다. 자기의 전 생애를 걸고 키치를 거부한 자유로운 영혼의 사비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삶 자체가 이 소설 전반에서 가장 키치스러웠다.
이들은 존재와 이념에 대한 시대의 질문을 정면으로 받으며 그 속에서 자신의 삶과 사랑을 영위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 삶을 쫒았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정의보다는 덜 중요한 것에 시선을 두게 되었다. 사랑에 목맸던 테레자는 카레닌의 죽음에, 여성 편력의 토마시는 테레자에게, 프란츠는 안경 낀 여대생에, 사비나는 단란한 가정에.
정의로운 것은 분명 옳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조금만 떨어져도 옳음에 대해 말하긴 쉽다. 비리는 나쁘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해선 안 되고,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기회주의자처럼 사는 것도 비난받을 만하다. 그러나 정의 말고, 당신 삶에서 무엇이 과연 진정으로 의미가 있느냐고 물으면 그 답은 저마다 달라진다. 가족, 돈, 사랑, 명예 뭐든 간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는, 더 옳은 게 무언지 알면서도 좀 덜 정의로운 쪽을 선택하기도 한다. 개개인의 사정들을 알고 나면 더 옳은 것이 더 선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그런 상황이 되면 나라고 다를 리 없기 때문이다.
삶의 옳음은 저마다 다르다. 나를 고소했던 그자에겐 정치 발판과 명예가 바로 옳음이었을 것이고, 법정에 서서 증언하는 것을 거부했던 어떤 이에게는 배우자와의 화목이 옳음이었을 것이다. 가장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키치 속에 살며 자기의 결점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하는 것’ 은 거의 없다. 삶은 오직 한 번 뿐이므로, 많은 일들은 ‘그래도 괜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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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의 무죄가 밝혀지고 그 자의 죄가 드러나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그래도 괜찮다는 둥의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고 있던 동안에는 세상의 어떤 것도 괜찮지 않았었다. 기억이란 그런 거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를 지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