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 로맹 가리
법의 보호를 받기 힘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불법 체류자, 창녀, 유태인, 노인, 동성애자들의 거주지, 그곳은 삶도 죽음도 쉬운 것이 하나 없다. 2차 세계대전 시절, 수용소까지 끌려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유태인 창녀 로자는 나이가 들고 더 이상 몸을 팔 수 없게 되자 다른 창녀의 아이들을 맡아 길러주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모모는 그녀에게 맡겨진 아랍 아이였다. 부모도, 자기의 나이도 정확하게 모른 채 소외된 자들을 보면서 성장했지만, 모모 곁에는 투덜대면서도 사랑으로 키워주는 양 어머니 같은 로자 아줌마나, 삶의 진정한 지혜를 알려줄 현명한 하밀 할아버지가 있었고, 비록 동성애자지만 누구보다 마음 따뜻한 롤라 아줌마도 있다. 만약 내가 로자나 하밀, 롤라를 모모 없이 만났더라면, 과연 이 사람들을 그리 보았을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로자 아줌마가 죽어가는 과정, 아버지와의 재회와 같은 충격적인 현실조차도 모모를 통과하면 부드러워졌다. 반투명한 막 너머의 관람객처럼 한참 떨어진 곳에서 어린 모모를 지켜보고 있던 나는, 어느 순간 이야기의 한가운데에서 모모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어린 모모는 순수하기 때문에 세상을 참 아름답고 동글동글하게 보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읽다가 어느 순간 깨닫는다. 그는 어리고 철없어서가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책에서 블랑슈가 '장례식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죽음은 그렇지 못하다'라며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곁을 지켜보지 않은 사람을 절대 알 수 없을 거라고 하소연할 때, 나는 죽음에 대해 이토록 적나라한 표현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모모가 병든 노파의 죽음 앞에서 표현하는 다정하고 따스한 사랑을 보고는, 죽음은 그것을 겪는 본인뿐 아니라 그 곁의 사람들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걸 알았다. 죽음이 사자를 관 속에 고요히 잠재우기 전까지 짧게는 몇 분, 길면 몇 년을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만드는 시간, 이를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은 고통스럽고 괴롭다. 그러나 모모의 순수한 사랑은 그 모든 추한 죽음의 과정과 괴로움의 의미를 아름답게 승화시켜 독자들을 울린다.
책을 읽을수록 너무 많은 감정이 파도처럼 일어나서 독서를 자꾸 멈추게 되었다. 그 감정들은 거대한 슬픔 같기도 했고, 고요한 환희 같기도 했으며, 오래 머물렀음에도 잡으려고 하는 순간 흩어져 버리는 기억같이 흘러내려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창녀로 살다 늙어 병들고 치매가 온 가난한 유태인의 노파의 보잘것없는 죽음, 그리고 그 곁을 지킨 광기 어린 소년의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노파는 창녀의 자식을 맡아서 돈을 받고 양육해 주던 사람이고, 출생 신고 등의 복잡한 문제가 들통날까 봐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아이는 정상적으로 교육받고 양육되며 자라지 못했기에 주 양육자의 죽음에 매우 충격을 받았고 기이한 행동을 하며 시체 곁에 머물렀다.
모모의 눈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것이 진실로 보인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삶이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행복이야말로 그들의 최종 목표이기에, 추하고 슬픈 것은 나쁜 것, 피해야 할 것이며, 모모가 겪은 일은 비극 그 이상도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모모의 눈으로 보면, 추하고 슬프고 죽어가는 것 속에서도 피어나는 아름다움과 사랑을 볼 수 있다. 행복을 좇아 헤매는 인간이 아니라 이미 거기 있는 행복을 볼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