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읽는 것만 같았던,

프로젝트 헤일메리 - 앤디 위어

by 어제만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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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 준 사람이 이모였는지, 엄마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때 영화관에서 내가 처음 본 영화는 ET였다. 영화가 끝나고 누군가 내게 ET의 카세트테이프 녹음 요약본을 사 주었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여전히 줄거리를 모르는 채로 그 테이프가 닳을 때까지 수 백 번을 들었다. '식빵같이 생긴 이티의 머리'라고 시작하는 노래가 아직도 기억이 날 만큼.


시간이 더 흘러 ET를 티브이에서도 볼 수 있을 때쯤에서야 비로소 그게 외계인과 지구 어린이의 우정을 그린 따뜻한 이야기였단 걸 알게 되었다. 자전거를 하늘로 띄우는 초능력을 가진 식빵 머리 외계인이 밤하늘 어딘가에 분명 살고 있겠지.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들처럼, 나뿐 아니라 그 시기를 지나온 어린이들은 판타지에나 나올법한 긍정적인 상상력으로 우주를 꿈꾸고 세계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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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21세기가 되어도 여전히 외계의 다른 생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만 SF 만큼은 ET 시절 보다 훨씬 다양하게 진화했다.

프로메테우스, 엣지 오브 투모로우처럼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뿐 아니라, 그래비티나 콘택트처럼 과학에 기반해 있음 직한 이야기, 인간이 악당처럼 보이는 디스트릭트9 같은 영화도 오래오래 전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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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헤일메리가 발간되었을 무렵쯤 듄 시리즈도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며 우리 아파트 작은 도서관에 입고되었는데, 스케일은 훨씬 크지만 스토리가 구식이라 읽다가 포기했다. 스타워즈나 반지의 제왕처럼 배경이 엄청난 작품이라 하더라도 죽고, 죽이고, 싸우고, 빼앗고, 혈통이나 리더의 자질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깔고, 정의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살육이 정당화되는 이야기들에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열광한다는 것이 놀랍다.


악과 대항하며, 지키기 위해 살인과 전쟁에 가담하는 주인공들에게는 언제나 대의명분이 있다. 그러나 지구의 모든 전쟁 또한 대의명분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은 비극이라고 말하면서도 전쟁이 없는 세계는 상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정이나 외계인이 등장하고, 올 투모로우처럼 수 십억 년의 역사가 흐르는 이야기라 해도 그건 결국 다른 옷을 입은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이 책에도 적은 등장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침공의 대전쟁이나 영웅들의 서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지구를 구하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있는 주인공은 시니컬하면서도 긍정적인 평범한 사람이다. 그의 과학적인 지식은 일반인 보다 낫지만 인간적인 면모는 우리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태어난 인물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고,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애쓰는 성실하고 평범한 인물 정도는 된다.


작가가 서사를 쌓아나가는 방식은 치밀하다. 그래서 초반 주인공의 과학 상식에 대한 부분을 좀 견디면 후반은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읽힐 것이다. 분량이 꽤 되고, 과학 덕후들이 좋아할 만한 상세한 묘사들이 장벽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런 부분들은 과감히 건너뛰어도 무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과학이라는 조미료를 매우 적절히 사용한 재미난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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