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보다 지혜를.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 강용수

by 어제만난사람




우리는 인간을 매우 개성적인 존재로, 그리고 여타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로 여기지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도 동물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부분들이 많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결정 지워진 대로 살다 죽을 뿐이다.


한 인간의 타고난 성질과 주변 환경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건들은 씨줄과 날줄로 엮여서 삶의 행복도를 어느 정도는 결정짓는 것이다. 범부가 운명이라 부르는 그 인생을 바꾸려면 그의 세계관과 삶의 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관점을 부수고, 죽이고, 새로 만들 수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이의 가치관이라 해도, 그 사람의 내부에서 그것이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엄청난 경험과 정보들이 선택되거나 폐기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들을 통과하고 내 속에서 하나의 탑처럼 세워진 것, 신념이나 가치관으로 되어 버린 것, 정正으로 인정된 것을 되돌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워 올린 것을 부수는 데는 고통이 반드시 따른다. 그래서 증오나 미움이 곧잘 재료로 쓰이고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기 쉽다. 내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가장 미루고 싶은 일이기에, 자기의 모자란 면이 드러날 때, 사람들은 외부에서 원인을 먼저 찾는다. 즉,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투사의 대상으로 적을 찾는다.

나인 것, 우리인 것과 그 밖의 대상을 구분한 뒤, 회유하여 내 쪽으로 끌어들여지지 않을 경우 그 대상은 처벌받거나 파괴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한다.


좀 똑똑한 사람이라면 나의 부족함을 보완해 줄 새로운 이론을 개발할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의심 많고 결벽증적인 성격을 승화시켜 완성된 인격의 특징에 이성과 금욕적인 면을 강조하며 우월함을 인정받고 싶어 한 것과 같이, 니체가 자신의 불안과 외로움을 초인 이론과 여성에 대한 멸시로 가려보고자 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철학적 담론들이 진정 가치가 있으려면, 적어도 말을 한 자는 자기의 철학대로 살아가야 마땅하다.

현재에 살라고 말하면서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삶에 대해 미련을 둘 이유가 없다고 말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의 철학이 철학자 자신조차 행할 수 없는 꿈같은 이야기라는 반증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면서 쇼펜하우어가 불교를 좀 더 깊게 공부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의 말들은 '현재가 고통이며 그것은 집착과 번뇌 때문이니, 이를 멸하여 열반에 이르라.'는 불교의 사성제와 닮아있다. 그러나 고성제와 집성제에 대해서는 잘 설명을 한 것 같으나, 멸성제와 도성제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이 책이 단순하게 설명을 한 것인지, 쇼팬하우어의 논리는 멸성제나 도성제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지성에 대한 강조를 여러 번 하지만, 불교에서 무명의 괴로움을 멸하는 깨달음은 지성이 아니다. 깨달음은 체험이며, 그것은 수행을 떠나는 그 순간 이미 완성이 되어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떠나기로 결심한 자는 매 순간 자기를 버리는 연습을 하고, 매 순간 나의 경계가 확장되는 것을 경험하며, 궁극적으로 측은지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 된다. 생즉고의 삶을 겪는 모든 생명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대상을 두지 않는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아는 깨달은 이의 삶은 온화하고 고요한 파문으로 세상에 퍼져나간다.


과학적 가설은 증명이 되어야 이론이 된다. 철학자의 철학은 다수의 사람들이 따를 수 있으며 그리하여 세상이 더 나아질 때 유용한 철학이 된다.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는 것보다는 불교 공부를 하는 게 좀 더 유용할 것 같다고 느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란

이런 느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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