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주인공이나 서술자에게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되는 독자의 특성상, 처음엔 스티븐스라는 집사의 잔잔한 어조에서 느껴지는 재수 없음의 냄새를 꾹꾹 눌러 참으며 읽었다.
하지만 겸손을 가장하면서 결국 자기 자랑으로 귀결되는 말들만 늘어놓고, 감정이나 주체적 사고는 철저히 배제한 채 ‘품위’라는 이름의 역할에만 매달리는 주인공은 끝까지 자기기만의 대가로 남는다. 독서 모임 책이 아니었다면 다 못 읽었을지도...
스티븐스의 품위라는 것은 사실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한 방공호일 뿐이고, 책임을 회피하고 사고하지 않기 위해 덮어쓴 갑옷이다. 그의 주인 달링턴 경은 나치에 동조하고 유대인을 차별하면서도 스스로를 도덕적인 신사라고 믿는 인물이었고, 스티븐스는 그런 잘못을 침묵과 복종으로 떠받친다. 그는 직접적으로 유대인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지만, 명령을 수행하고 외면함으로써 악의 구조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책을 읽는 내내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올랐다.
그가 말하는 “그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반성이 아니라 자기 방어에 불과하다. 의지를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순간들이 숱하게 있었고, 그를 격려하고 지지해 줄 사람이 있는 순간조차 사고 자체를 거부한다. 아버지가 위층에서 임종을 맞을 때조차 그는 아래층에서 연회를 관리하며 겉으로는 흔들림 없는 집사의 모습을 유지했으니까. 심지어 스티븐스는 집사였던 아버지라면 자기를 이해해 주었을 것이다, 기뻐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아버지는 정말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죽음 앞에서 깨달은 것이다. 자기가 잘못 살았고, 아들도 잘못 키웠다는 걸. 하지만 그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켄턴 양에게도,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대사가 크게 없는데도 작가는 이런 미묘함이 느껴지도록 묘사를 했다.
켄턴 양과의 관계에서 스티븐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느낀 적이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무엇을 느끼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켄턴이 꽤나 적극적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순간에도 감정을 업무의 언어로 번역해 버렸고, 결국 둘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타이밍을 잃었다. 만약 켄턴이 직접적으로 청혼했더라도 그는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정체성은 이미 집사라는 역할에 너무 깊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사랑조차도 역할을 벗어나는 위협으로 여겼을 것이다.
스티븐스는 끝내 자기 삶의 기회를 붙잡지 못했다. 마지막 바닷가 장면에서 그는 “내일 더 나은 집사가 되어야겠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희망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자기기만으로 보인다. 그에게 남은 건 후회이지 반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한은 과거를 곱씹을 뿐이지만 반성은 자기 삶을 바꾸는 힘이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끝내 자기 자신을 향하지 않고 다시 주인을 향한다.
“주인은 후회라도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럴 수도 없었다”
라며 자신을 낭만화하지만 사실 그 역시 늘 선택하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기로, 생각하지 않기로.
그렇기에 스티븐스는 아이히만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사고를 멈춘 채 체제와 역할에 자신을 맡긴다는 점에서 같은 선상에 서 있다.
하지만 그와 우리가 많이 다를까?
우리도 곧잘 ‘품위’나 ‘전문성’을 핑계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곤 한다. 그땐 어쩔 수 없었다 합리화하고, 딱딱한 말과 표정 뒤로 진짜 마음을 숨긴다.
스티븐스를 미워하면서도 우리는 그와 닮아 있음을 본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평범한 악은 도사리고 있기에, 사유하지 않는 하루가 쌓이면 어느 날 사유하지 않은 인생이 된다. 남아 있는 것은 격식의 뼈대뿐, 살과 피는 사라진다.
책의 원제는 The remains of the day로,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남아있는 나날'보다는 생의 잔여물이라든지, 세월의 남은 조각, 흔적 같은 느낌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책의 내용을 전혀 모르고 읽었기 때문에 꽤 긍정적이라는 느낌의 제목만 보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day와 remains의 중의적인 의미를 표현하기에는 딱히 그럴싸한 단어가 없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