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건너는 두 번째 독서

면도날 -서머싯 몸

by 어제만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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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 읽은 서머셋 몸의 면도날을 다시 읽었다.



과거의 내가 쓴 면도날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 왠지 모르게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나고, 글을 쓸 때의 감정들도 어렴풋이 기억나는데도,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낯설어한다.


그때 나는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중이었다. 읽고 있는 책에서 다른 책이나 철학자의 이름이 나오면 그 책을 찾아보고, 또 그 책에 나오는 다른 책이 있으면 이어서 책을 읽는 식으로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다 보니 사회, 과학, 철학서 외에도 종교, 신비주의, 영성 관련 도서도 꽤 읽게 되었다. 답을 찾고 싶어서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뭔가를 했지만, 요령도 없고, 지혜도 없고, 스승도 없었다. 일기처럼 쓰는 글은 솔직했지만 온통 헤매기만 했다.


그러다 나름대로의 답을 구했을 때, 그 답이 너무나 시시해서, 이러려고 그렇게 힘들게 돌아왔나 하고 몇 번을 돌아가 되찾고자 시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한계인 것인지, 정말 그 외의 답이란 없는 것인지 매번 답은 같았다.

'살아라.'

그저 그뿐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살기.



그 해 여름, 우리는 집을 샀고, 이듬해 겨울에 이사를 했다.

"사람들이 현실에 90% 발을 대고 10% 정도는 꿈을 꾸며 산다면 너는 90%는 꿈을 꾸고 10%만 현실을 살고 있는 것 같아."라고 남편은 내게 말했다.

"이번에 이사를 가게 되면 정말 현실을 살 거야. 나름대로 답을 얻은 것도 같아서, 현실에 90% 이상 발을 딛고 열심히 살게." 하고 내가 답했다.


삶으로부터 배울 때는 언제나 고통이 함께 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만, 피할 수가 없다면 적어도 내 주위에는 나를 지지해 주고, 나를 사랑해 주며 아껴주는 좋은 이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적이 생길 수도 있고, 가치관이 다른 문제들이 생길 수도 있지만, 양심을 지키면서 올바르게 세상에 한 걸음, 한걸음 발을 내딛는 동안 부디 혼자가 아니기를 바라며, 나는 나의 신에게 기도했다.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달아나서 정신의 영역으로 숨어버리지 않겠노라고, 그러니 '살아라'라고 하는 그 말이 주는 지혜를 꼭 배울 수 있게 해 달라고.


이사를 오기 전, 몇 번인가 굉장히 무서운 꿈들을 꾸고, 이사 전날부터 종양이 커져서 응급실을 다녀오고, 며칠 뒤 결국 제거 수술을 받아야 했을 때도 이후의 미래가 그토록 힘겨울 줄은 몰랐다. 알았더라도 내가 그런 기도를 했을까.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바라볼 때, 과거의 행적들이 구식으로 보이지 않기도 어렵겠지만 어떻게 보아도 그때의 나는 순진하고, 내 세계에 갇혀 어설프고 촌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되었건 다짐한 대로, 기도했던 대로, 나는 세상의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잘 살아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우정을 나누었고, 함께 싸우거나 혼자 맞서기도 했다. 그동안에도 아이들이 자랐고, 매 순간마다 새로운 문제들이 과제로 주어졌다.


내가 받은 소박한 답은 '살아라' 였을 뿐, 지혜는 삶 그 자체를 통해서 배워야만 했다. 나는 성공보다 실패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돌이키기 힘들 만큼 패배감에 휩싸일 때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적에 대한 증오, 양육에 대한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 무엇 하나 지혜롭게 헤쳐나간 것이 없다. 이것이 관문이거나 시험이었다면 나는 진즉에 탈락하고 낙제했을 것이다. 나는 매 사건마다 감정적으로 심하게 동요했으며, 그걸 온통 흩뿌리고 다녔다.


하나의 문제가 겨우 매듭을 지었다 싶으면, 다음 문제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에반게리온의 사도처럼, 누가 나를 레벨 업 시키려고 미션을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배치해 뒀을까. 겨우 숨만 돌릴 수 있게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그 하나가 조금 진정된다 싶으면 다음 하나가 생겼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삶이란 게 고달프지, 지쳐서 더는 못 갈 것 같다고 헐떡이다가도, 짧은 행복과 휴식의 시간들이 찾아왔을 때는 지금까지의 고생은 해피엔딩의 서사를 위한 복선이었기라도 한 양, 앞으로는 좋은 일만 생기겠지 하는 어리석은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엔딩은 죽음이라는 새드엔딩으로 귀결됨을 알면서도.


현실에 충실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7~8년쯤 지나자, 어느 순간부터는 난 평생 동안 이런 삶만 살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삶의 의미? 인생의 목적? 그런 건 생각할 시간도 없고 까마득하기만 했다.


숨 돌릴 만하면 사건이 터지거나, 가족이 아프거나, 내가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면 살수록 더 집착하게 되는 중독적인 면이 있다. 세속적인 모든 것들은 가속도를 지녀, 나를 잃어버리고 세상에 삶이 들러붙도록 만들었다.


과거 나는 아이들을 경쟁적으로 비교하며 키울 마음 따윈 전혀 없었다. 돈은 수중에 있는 만큼 아껴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사를 온 뒤에 나는 달라졌다.

집값이 미친 듯이 치솟던 어느 해에는 나도 부동산 투자를 해서 돈을 좀 벌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전세를 안고, 낡고 오래된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샀다가 좌불안석이 되어 금방 되팔아 버렸다. 주식이 오르는 어느 해에는 남편의 성화에 주식도 이것저것 담았다. 오르면 기분이 좋지만 대개 내가 산 주식은 조금 오르다 결국은 마이너스가 되곤 했다. 그쯤 되면 초연해서가 아니라, 고통스러워서 주식을 보지 않게 되었다.

내가 집값이나 주가가 오르는 걸 보며 잠깐 설렜던 마음은 엘리엇이 파리 사교계에서 귀족들의 초대를 자랑하며 빛나려 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둘 다 결국 텅 빈 답을 쥐게 되었다는 점도 같다.


브래들리 부인과 엘리엇이 이사벨의 결혼에 대해 간섭한 것을 세속적이라 본다면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간섭하는 엄마의 욕망도 같은 선상에서 세속적이다.

초등 고학년만 되어도 엄마들은 특목중, 특목고, 명문대에 아이를 걸어놓으려 했다. 그리고 그건 '내 꿈'이 아니라 '아이가 꾸는 꿈'이라고 조용하게 말했다. 아이들도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욕심내기 시작하다 보니, 그 꿈이 엄마의 꿈인지 내 꿈인지,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꿈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듯했다.

내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런 비교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마음을 단단히 잡았지만, 현실을 살아가면서 그러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남들이 보내는 학원 정보를 듣고 아이를 거기 보내보고, 조금이라도 더 잘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니, 나름 숭고함도 있다고 믿고 싶었다. 어떤 기도도 결국 내 마음을 평화롭게 할 욕심으로 하는 줄 알면서 말이다.


일상의 나 자신을 냉정하게 볼 수 있는 시간이 가끔 생기면 스스로가 속물처럼 느껴지곤 했지만, 의외로 그렇게 역겹지 않아서 놀랐다. 이전에 나는 타인의 세속적인 면을 볼 때 나도 모르게 본능적인 불편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다짐도 했고. (다짐처럼 그렇게 세상 고고한 사람처럼 살지는 못했다.) 애쓸 땐 모든 것과 맞서 싸우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 몇 가지를 좀 내려놓으니 그냥 순응해서 흘러가면 되고, 다들 그렇게 살고 있어서 편안하기까지 했다.


면도날의 래리 같은 사람은 소설 속에서나 있는 게 아닐까. 현실은 쥐새끼조차도 제 것을 더 가지려고 욕심내는 세상이었고, 나 역시 현실을 살고부터는 그런 쥐들이나 다름없었다. 물욕 없는 청렴한 사람의 이야기는 멀고 아득하다. 내 주위에 보이는 사람들은 비슷비슷하게 어느 정도 우아하면서, 탐욕 또한 적당히 부렸다. 나도 세속적으로 살았기에 신념의 충돌은 없었지만, 원하지도 않는 것을 왜 좇고 있나 싶은 생각이 종종 들었다.


세속적인 삶은, 계층의 아래로 내려갈수록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시스템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세속인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나도 연달아 이어지는 사건들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은 일도 소홀히 하면, 언젠가 반드시 몇 배로 내게 되돌아왔다.


모든 문제들은 갈등의 상황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런 경우 화가 나거나 고통스럽지 않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여러 사건들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증오는 커다란 힘이고 에너지의 원천이 되어 줄 수 있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사랑 외에는 답은 없다는 것. 나는 왜 예수가 왼뺨을 맞거들랑 오른뺨을 내주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는지, 직접 겪고 나서야 드디어 이해했다. 증오로 적을 죽일 수는 있지만, 그 에너지는 항상 나 또한 동시에 태우면서 작동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13년 전,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던 그때에도 내 나름의 신념을 세워두고 '이래야 올바르지,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거지.' 하고 여겼을 뿐,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은 막연하고 흐릿했다. 나는 현실을 살지 않던 몽상가일 때조차 내 속의 나와 끊임없이 싸우고만 있었던 것이다. 사춘기 이후로 쭉 나는 부족한 내가 싫었으나, 폭풍 같던 딸의 사춘기를 겪으며 비로소 용서를 배웠다. 그 전쟁은 내가 패배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딸을 사랑하게 만들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또한 가르쳐 주었다. 여전히 래리의 해탈은 내게 멀게만 느껴지지만,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은 비가 그친 것이다.


13년의 시간, 그 하루하루가 쌓여서 과거의 나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내가 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즉 우리는 13년 이전의 과거는 공유하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공유할 수 없다. 거기다 기억은 상황에 따라 왜곡되거나 잘못 기억되기도 한다. 13년 전의 나에게 생생한 어떤 사건은, 지금의 내게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결국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은 오직 시간이 하나의 축일 때만 맞는 말이 것이다. 현재의 내가 보는 13년 전의 나는, 같은 몸을 공유하고 있는 다른 사람이다.


과거로 돌아가 어린 자기를 만나면 측은해하며 도와주려는 영화의 내용과 달리, 실제로 과거의 자신을 만나게 되어서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나의 생사과 관련이 없기만 하다면 오히려 서로 미워하며 죽이려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미래의 나는 흑역사의 주인공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이 싫어서,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내가 생각보다 너무 변변찮아서.


지금의 나는 13년 전의 나와는 달리, 몽상가가 되지도, 답이 없는 질문을 들고 헤매지도 않는다. 이제 나는 꿈꾸며 사는 것도, 현실에 발을 디딘 것도 모두 나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13년 전의 나는 래리의 삶에 동화되고 싶었지만, 지금의 내게 래리는 서구 기계주의 사상과 전쟁에 이골이 난 20세기 초의 젊은이로 보일 뿐이다. 동양 철학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그의 삶도 멋진 삶이긴 하지만 정답은 아니며, 재산을 버리건 갖건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야말로 해탈이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이제는 작가가 작중 중심인물을 묘사하는 방식과 그의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 작가의 세속적이거나 속물적인 부분이 저절로 떠올라 겹쳐 보이게 된다. 과거에는 그저 래리는 소설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주인공 래리였다면, 지금은 서머셋 몸이 창조한 소설 속 이상적 인물인 래리로 읽히는 것이다.


서머셋 몸의 이상은 래리를 지향하지만, 현실은 엘리엇의 부유함과 허영심에 실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엘리엇과 래리 그 중간 어디쯤에 걸쳐서 살아가고 있고, 자신이나 자식들은 엘리엇의 삶을 살았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타인은 래리처럼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이런 모순이야말로 인간적인 면모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느껴지는 불편함은 이것이 언젠가는 해결되어야만 하는 과제임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는지.


13년 전 그 책이 나를 현실로 끌어냈다면, 이번엔 나를 다시 내면으로 데려갔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듯, 같은 책도 두 번 읽을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책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다. 그래서 좋은 책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거울처럼 달라진 나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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