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을 간파할 때, 신화는 죽고
그 너머가 열린다

신이 부르는 노래 : 바가바드기타

by 어제만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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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타라스트라 왕의 아들들과 판두의 아들들의 전투를 시종 산자야가 천리안으로 보고 왕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장님인 드리타라스트라는 첫째 왕자였으나, 장애 때문에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판두왕이 사냥터에서 사슴을 죽이고 저주를 받아 후사를 낳을 수 없게 되는 바람에 드리타라스트라는 왕이 되었다.

숲으로 들어간 판두는 신에게 빌어 신의 힘으로 자녀들을 얻게 되고, 이 자녀들은 왕위를 자신들이 이어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드리타라스트라의 아들들은 현 왕의 자녀인 자신들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며 전쟁이 일어남.


판두의 아들 아르쥬나의 마차를 모는 크리슈나의 환생자는, 혈육 간의 전투를 앞두고 망설이며 울고 있는 아르쥬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뒤따르고, 죽음 뒤에는 필히 재생이 있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을 위해 그대가 슬퍼할 필요가 없다. 태어나기 전의 모든 존재는 인간의 감각에 나타나지 않는다. 태어나고 죽는 그 순간에 나타난다. 죽었을 때 그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은 상태로 환원된다. 그러니 아르쥬나여, 여기에 슬퍼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전장에서 죽는다면 하늘을 얻을 것이요, 승리한다면 지상을 누릴 것이니 지금 일어서서 싸울 결의를 하라. 기쁨과 고통, 이익과 손해, 승리와 패배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싸움터에 나서 싸우라.



『바가바드 기타』는 인도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속에서 발췌된 철학적 대화로, 고전으로 불린다.

태어남과 죽음, 의무와 욕망, 영혼과 해탈을 다루며 인류 보편의 문제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텍스트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면 문학적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고, 이야기의 긴장감이나 묘사적 세련미보다는 교리 설파에 가까운 교조적 반복이 주를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고전으로 존중받는 이유는 문학적 성취보다는 철학적, 종교적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신화적으로 읽을 때는 아름다운 문장이나, 그렇다고 해도 전쟁과 살육의 정당화의 모순이라는 문제는 피할 수가 없다. 아르주나의 망설임을 다독이며 크리슈나는 “죽음은 단지 현상일 뿐”이라 설득하고, 의무(dharma)를 위해 싸우라 명령한다. 이는 곧 혈육을 죽이는 전쟁조차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셈이다.


간디는 바가바드 기타를 평생의 정신적 지침으로 삼았지만, 전쟁은 외부의 살육이 아니라 내면의 전투라고 해석했다. 욕망과 분노, 탐욕과 비겁함을 물리치는 싸움이 진짜 전쟁이라는 것이다. 사실 모든 종교와 신화들은 현상이 아니라 상징으로 읽혀야 한다. 간디의 해석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자신의 이상과 달리, 실제 살아온 삶은 꽤 모순적인 구석이 많다.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영국을 지지하며 인도인의 참전을 독려했고, 이는 수많은 인도 청년의 희생을 불러왔다. 비폭력을 내세우면서도, 정치적 실리 앞에서는 전쟁 협력의 길을 택한 것이다. 한국의 시인·소설가들이 일본 제국주의 전쟁에 조선 청년의 참전을 권유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규정되는 것과 비교하면, 간디는 훨씬 너그럽게 기억되고 있다.

가족관계에서도 장남 하릴랄이 무슬림 여성과 결혼하려 했을 때, 항상 종교 화합을 외치던 간디가 무슬림 며느리를 들이는 것을 가장 강하게 반대했다. 사실 간디는 결혼뿐 아니라 변호사가 되려던 아들의 꿈도 꺾어 곁에 두도록 했었다. 또한 성적 금욕을 평생 서원했으나 끝내 완전히 절제하지 못했고, 젊은 여성과 함께 잠자리를 하며 ‘욕망을 이겨내는 실험’을 했다는 사실은 지금도 비판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사회는 간디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기보다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로 포장해 기려왔다. 독립 직후의 혼란 속에서 통합의 상징이 필요했고, 영웅적 서사가 민족 자존심을 세워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간디의 모순을 직시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도의 구조적 한계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암베드카르나 아룬다티 로이 같은 지식인들이 “간디 신화를 성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도의 민주주의와 평등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라고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가바드 기타』와 간디 모두, 위대한 유산과 함께 심각한 모순을 동시에 품고 있다.

고전이 반드시 아름다운 문학일 필요는 없으며, 위인이 반드시 결함 없는 성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텍스트와 인물을 비판적으로 마주하고, 신화적 상징과 현실의 적용에 대해서 냉정하게 판단하기 위해 그것의 좋은 면, 나쁜 면을 모두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자신이 이와 같은 양면성을 지닌 모순적인 존재이므로, 미화나 왜곡없이 보고 분별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자라난 신화와 위인들 역시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 태어난 관점이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게 되니까.




그대는 반드시 세 가지 구나스 (사트바-밝고 가벼움, 라자스 -변화와 활동, 타마스 - 어둡고 둔중)를 인식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소유하거나 모아두지 않고 늘 아트만을 의식하는 자제력을 지녀야 한다.


그대의 일상은 행위 그 자체의 권리가 있을 뿐, 행위의 결과나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위의 업적에 대한 욕망이 행위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되며, 게으름의 여지를 주어서도 안 된다. 지고한 신에게 그대의 마음을 고정시키고 모든 행위를 하며 업적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라. 성공이나 실패에도 평정심을 가진다면 이미 그대는 요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감각의 대상을 생각하면 그것에 대한 집착이 생겨난다. 집착으로부터 욕망이 생겨나고 욕망이 좌절되면 분노가 생겨난다. 분노로부터 어리석음이 생기고, 어리석음으로부터 경험의 혼란이, 경험의 혼란으로부터 분별심이 상실된다. 분별력을 상 실한 사람은 인생의 유일한 목적을 잊게 된다.

그러나 탐욕과 증오를 버리면 자아는 평정을 얻는다. 평정 속에서 그대의 모든 고통과 슬픔이 소멸된다.


명상 없는 평화는 없으며, 평화 없는 행복 또한 없다.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평화를 알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해탈의 길은 명상을 통한 지혜의 길(jnana yoga)과 이기적이지 않은 행위를 통한 실천적 태도를 지향하는 행위의 길 (karma yoga)이다.


모든 행위는 3가지 비물질적인 속성(구나스)에 의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이들은 자의식에 빠져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감정이 어떤 대상에 빠져있을 때일지라도 단지 구나스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타인이 행한 의무가 성공적이었다고 부러워하기보다는, 비록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그대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더 좋다.


신성을 따르려는 이들은 그들이 신앙하는 신에게로 가고, 조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조상에게로 간다. 초월적인 힘을 기원하는 이들은 그 힘의 원천으로 갈 것이지만 나를 신앙하는 이들은 내게로 온다.


나는 어느 누구도 특별히 선택하여 사랑하지 않으며, 특정한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한 생애에서 죄의식에 빠져 있을지라도 또 다른 이웃에게 신을 섬기듯 정성으로 헌신하면서 바른 서원을 세웠다면 나는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껏 죄인을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으니 모든 인간은 다 신을 닮은 성스러운 존재이다.


사트바는 순수한 빛을 통해서 아트만을 비추게 한다. 그러나 사트바는 그대에게 현 생애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지혜를 갈구하도록 얽어맨 사슬이다. 열정의 동력인 라자스는 현생애에서 그대에게 쾌락과 소유를 갈망하도록 만들 것이다. 라자스는 그대에게 끝없이 행위하도록 얽매어 놓을 것이다. 어두운 무지의 타마스는 그대를 미혹하게 할 것이다. 타마스는 현생애에서 그대를 나태함과 무기력, 무감각의 상태로 이끌어 환상의 질곡에 빠지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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