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 세상에 문 두드리다.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산다는 것이 귀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깨달아가는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가져가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은 따뜻함, 흔들림 없는, 명랑해 주위를 밝게 하는,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등 다르다. 하루하루 숨 고르며 주어진 것들을 꼭꼭 밟아가며 알아가는 것이 나를 따뜻하게 덮이며 이끈다. 그 이야기를 엮어보고 싶어 서툴지만 글로 종알거려보려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아버지 술주정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 보니, 아버지 사는 모습도 내가 태어난 것도 궁금했다. 그런 탓이었는지 어른들에게 초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사람이 태어난 이유를 한 동안 질문을 했다. 그때마다 대답은 안 해주고 어른들은 웃기만 하셨다.
대답을 해주지 않으니 더 묻지를 않고 있다가 원하지 않던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기였을 것이다. 그때는 물을 공동수도에서 길어다 먹었다. 그곳에서 나를 이뻐했던 동네 아줌마에게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아요’라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줌마는 깔깔 웃으며 맹랑하다 내 볼을 잡아당기며 ‘그래 너는 무엇 때문에 사니? 니부터 말해봐라’라고 내게 반문하셨다.
그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깔깔 웃던 아줌마와 동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메아리쳐 그 뒤 더는 묻지 못하고 궁금증을 안고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 때쯤 막바지 공부에 지쳐 있었고, 친구들도 나도 취업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아요’라는 반문에 당황했던 내 모습이 갑자기 떠올라, 피식 웃으며 ‘사는 게 별거겠어’라고, 가방끈을 고쳐 매며 혼잣말을 했다.
단짝도 취업에 대한 부담감이 있어 하교 길에 서로 원서 쓴 곳이 있느냐 묻다 ‘너는 사는 게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물었다. 친구는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너는? 그게 왜 궁금한데?’라고 되묻는 말에 기다린 것처럼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 거 아니겠어’라고 어른처럼, 내 일 아닌 듯 말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살아가며 일어나는 죽음, 가난, 돈, 가족 등으로부터 의문이 생기는데 ‘그냥 태어났으니…’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 대답한 내가 참 얄미웠다. 그 나이 때는 사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근로학생으로 공부와 학업을 같이 하려니, 힘들다 느낀 것이 전부였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려니 두려웠던 것일까? 시작도 안 한 내가 다 경험한 어른처럼 굴었으니 맹랑했던 것이 맞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그 맹랑했던 아이가 어느 때부터인가 기가 죽어지냈다. 그 불편한 마음들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 편안함을 가지려 했다. ‘나’라는 사람이 가족을 포함한 타인과 어떤 존재로 엉기어 살아가는지, 부딪히지 않고 좋은 인연으로 잘 살아내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의견이 엇갈리거나, 화남으로 내 감정이 건드려지면 유연하지 못한 내 모습에 씻기지 않는 시간들을 마주하며 ‘나는 누구일까?’ 자신에게 질문해왔고, 의문이었다.
그 질문 속에는 왜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면 차분하게 말하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내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까?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무엇 때문에 떨리는 걸까? 윗사람이나 전문가들 앞이라면 머리가 하얘져 말을 못 할까?, 내게 일이 주어지거나, 지시받으면 어쩐다고 당황하는 걸까? 그러고는 그 모든 걸 다 책임 지려 할까?
그 질문 찾아 의문을 풀어가고자 내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질문의 출발인 태어나는 순간부터 들여다봤다. 내가 태어난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다고 봤다. 엄마와 아빠 의지였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내 의지가 있다고 보았다. 그 의지는 이 세상과 만나려 ‘으앙’ 우렁찬 울음을 내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 탄생은 최고의 작품으로 경이롭다. 물론 엄마와의 협작품이다. 탄생의 의술이 부족했던 시절에 산파가 아기 울음소리로 건강 정도를 알아봤다고 한다. 나는 산파의 도움도 없이 집에서 할머니가 받아주셨다고 했다.
할머니는 분명 며느리의 자궁에서 손녀인 내가 머리를 내미는 순간 받아내어, 나의 엉덩이를 세차게 때려 울음을 토해내도록 하였을 것이다. 방문 밖에서 아버지가 그 울음을 듣고 기뻐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아기 울음소리에 새로운 식구가 생기었다고, 서로 맞잡은 손을 들고 펄쩍펄쩍 뛰며, 첫 만남을 기뻐하지 않던가!. 그렇다고 병원과 TV 드라마나 영화처럼 환영받는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탄생이든 그 기쁨을 오래오래 간직하며 살아가는 힘의 에너지가 될 것이라 보았다. 가족이 모이면 자신이 태어난 순간을 내 엄마에게 들으며, 내가 자식에게 들려주며, 그 감동의 시간에 머물며 깔깔대고 웃지 않던가! 이 점이 나에게 중요했다.
엄마는 일을 하고 돌아와, 저녁밥을 지으려 부엌에 들어갔다가, 진통이 와서 나를 낳았다고 했다. 울음이 커서 사내아이인 줄 알았다고 했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들이 또 태어나기를 바랐기에,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첫 딸이어서 아들이 아닌 것에 서운함은 면했다고 했다.
이게 무언가! 나는 가족들에게서, 마지못해 받아들여진 생명이었다는 것 아닌가?
저항이 올라왔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생명이라 내 잘못이 아니다. 엄마의 잘못은 더욱 아니다. 내가 딸이라는 것에 거부받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화가 났다. 그 화는 한 동안 철없이 반항하던 고등학교 시절을 넘어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를 미워하는데 머물렀다.
때때로 반항하는 나에게 엄마는 ‘할머니, 아버지에게 딸을 낳아서 떳떳이 미역국도 못 먹고 기죽어 살았다. 너까지 왜 힘들게 하냐’며, 나의 반항이 멈추기를 호소하며 말을 건네주시는데, 뜨거운 돌덩이가 입 밖으로 올라와 눈물이 흘렸다.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방울에 맴도는 엄마의 말에, 나도 모르게 ‘그럼 나를 낳지 말았어야지 나를 왜 낳아가지고 누가 기죽어 살래’라고 엄마에게 쏘아 부쳤다.
내 탄생이 엄마에게 빚진 것 같았다. 엄마에게 말을 건네는 것보다 불만 가득한 태도에 올가미 씌워 침묵으로 일관했다. 필요한 말에 툭툭 한 마디씩 던지고, 나 스스로를 죄인으로 조여드는 시간들이 흘렀다. 시간은 내 마음과 달리 휙휙 지나갔지만, 불쑥불쑥 '마지못해 태어난 생명은 없다' 생각 드니 살아가는 존재감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답은 아니었다.
누구나 조상이라는 존재가 있어 태어나고, 엄마의 출산이 내게로 온 것을, 내 존재 수용에 풀리지 않은 마음이었다. 나 자신을 갉아먹는 괴로운 심정을 희석하고자 그걸 말하기 좋게 운명이라고 하던가? 그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스물두셋 정도였지만 완전한 동의는 아닌, 엄마와 나에게 좋은 묵언의 합의점이라고 보았다. 어른들 말을 빌어 심간(心肝) 편하게.
역사까지 논할 생각은 없다. 문외한이기도 하고, 나와 비슷한 연배 사람들은 거의 그러했다는 점도 있고, 세월이 달라졌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인간 존재 자체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지금도 그러한 점이 임금 차이, 직위 차이, 인식 차이가 남아 있는 사회의 흐름이 마음에 안 들었다. 여성운동가들이 들고 일어 난 이유를 알만 했다. 거기에 합세하여 인식을 바꿀 생각조차 못하고 묻어 산 세월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 엄마는 물론이고 나도 가족이나 타인들에게도.... 기죽어 살다, 서른 중반에 눈 떴지만 육십을 달린다. 이제라도 기죽어 산 나를 발견한 것에 감사해야 할 판. 살아있으니!
딸이라고 그 누구도 허투루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내 존재를 인정해주는 행위가 생일이다. 생일 때마다 먹는 미역국은, 나를 위한 것인지, 부모를 위한 것인지, 자라면서 투덜대며 따져 보았지만, 둘 다를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어릴 적 생일 미역국을 얻어먹기는 하늘에 별따기였다. 나의 집에서는 오빠들이 우선이었고, 가난도 한 몫했다.
어릴 때 적어도 초등학교 전까지 나의 엄마와 내가 잘 맞았는지는 알 수 없다. 엄마의 기억을 빌어보면, 나는 세 번째로 키우는 아이였으니 엄마에게는 좀 더 수월 했다고 하였다. 엄마 입장에서는 딸이어서 조금은 시부모님 눈치가 보여 내가 울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고 하셨다. 어찌 보면 나는 젖먹이 때는 순한 아이이기도 했지만 방치되었던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