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희 Dec 23. 2020

나를 이해하는 게 먼저였어

프롤로그- 나, 세상에 문 두드리다.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산다는 것이 귀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깨달아가는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가져가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은 따뜻함, 흔들림 없는, 명랑해 주위를 밝게 하는,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등 다르다. 하루하루 숨 고르며 주어진 것들을 꼭꼭 밟아가며 알아가는 것이 나를 따뜻하게 덮이며 이끈다. 그 이야기를 엮어보고 싶어 서툴지만 글로 종알거려보려 한다. 




       ☸ 나는 아이 답지 않게 맹랑한 아이였다. 


   ‘나는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아버지 술주정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 보니, 아버지 사는 모습도 내가 태어난 것도 궁금했다. 그런 탓이었는지 어른들에게 초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사람이 태어난 이유를 한 동안 질문을 했다. 그때마다 대답은 안 해주고 어른들은 웃기만 하셨다. 


대답을 해주지 않으니 더 묻지를 않고 있다가 원하지 않던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기였을 것이다. 그때는 물을 공동수도에서 길어다 먹었다. 그곳에서 나를 이뻐했던 동네 아줌마에게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아요’라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줌마는 깔깔 웃으며 맹랑하다 내 볼을 잡아당기며 ‘그래 너는 무엇 때문에 사니? 니부터 말해봐라’라고 내게 반문하셨다. 


그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깔깔 웃던 아줌마와 동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메아리쳐 그 뒤 더는 묻지 못하고 궁금증을 안고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 때쯤 막바지 공부에 지쳐 있었고, 친구들도 나도 취업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아요’라는 반문에 당황했던 내 모습이 갑자기 떠올라, 피식 웃으며 ‘사는 게 별거겠어’라고, 가방끈을 고쳐 매며 혼잣말을 했다. 


단짝도 취업에 대한 부담감이 있어 하교 길에 서로 원서 쓴 곳이 있느냐 묻다 ‘너는 사는 게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물었다. 친구는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너는? 그게 왜 궁금한데?’라고 되묻는 말에 기다린 것처럼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 거 아니겠어’라고 어른처럼, 내 일 아닌 듯 말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살아가며 일어나는 죽음, 가난, 돈, 가족 등으로부터 의문이 생기는데 ‘그냥 태어났으니…’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 대답한 내가 참 얄미웠다. 그 나이 때는 사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근로학생으로 공부와 학업을 같이 하려니, 힘들다 느낀 것이 전부였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려니 두려웠던 것일까? 시작도 안 한 내가 다 경험한 어른처럼 굴었으니 맹랑했던 것이 맞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 불편한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누구일까?’ 스스로에게 묻곤 하였다.


그 맹랑했던 아이가 어느 때부터인가 기가 죽어지냈다. 그 불편한 마음들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 편안함을 가지려 했다. ‘나’라는 사람이 가족을 포함한 타인과 어떤 존재로 엉기어 살아가는지, 부딪히지 않고 좋은 인연으로 잘 살아내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의견이 엇갈리거나, 화남으로 내 감정이 건드려지면 유연하지 못한 내 모습에 씻기지 않는 시간들을 마주하며 ‘나는 누구일까?’ 자신에게 질문해왔고, 의문이었다. 


그 질문 속에는 왜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면 차분하게 말하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내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까?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무엇 때문에 떨리는 걸까? 윗사람이나 전문가들 앞이라면 머리가 하얘져 말을 못 할까?, 내게 일이 주어지거나, 지시받으면 어쩐다고 당황하는 걸까? 그러고는 그 모든 걸 다 책임 지려 할까?


그 질문 찾아 의문을 풀어가고자 내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 내가 태어난 것에 관심을 가졌다.


  질문의 출발인 태어나는 순간부터 들여다봤다. 내가 태어난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다고 봤다. 엄마와 아빠 의지였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내 의지가 있다고 보았다. 그 의지는 이 세상과 만나려 ‘으앙’ 우렁찬 울음을 내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 탄생은 최고의 작품으로 경이롭다. 물론 엄마와의 협작품이다. 탄생의 의술이 부족했던 시절에 산파가 아기 울음소리로 건강 정도를 알아봤다고 한다. 나는 산파의 도움도 없이 집에서 할머니가 받아주셨다고 했다. 


할머니는 분명 며느리의 자궁에서 손녀인 내가 머리를 내미는 순간 받아내어, 나의 엉덩이를 세차게 때려 울음을 토해내도록 하였을 것이다. 방문 밖에서 아버지가 그 울음을 듣고 기뻐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아기 울음소리에 새로운 식구가 생기었다고, 서로 맞잡은 손을 들고 펄쩍펄쩍 뛰며, 첫 만남을 기뻐하지 않던가!. 그렇다고 병원과 TV 드라마나 영화처럼 환영받는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탄생이든 그 기쁨을 오래오래 간직하며 살아가는 힘의 에너지가 될 것이라 보았다. 가족이 모이면 자신이 태어난 순간을 내 엄마에게 들으며, 내가 자식에게 들려주며, 그 감동의 시간에 머물며 깔깔대고 웃지 않던가! 이 점이 나에게 중요했다.




        ☸ 누구든 그러할 진대 나의 탄생을, 가족은 기뻐했을까? 


엄마는 일을 하고 돌아와, 저녁밥을 지으려 부엌에 들어갔다가, 진통이 와서 나를 낳았다고 했다. 울음이 커서 사내아이인 줄 알았다고 했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들이 또 태어나기를 바랐기에,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첫 딸이어서 아들이 아닌 것에 서운함은 면했다고 했다. 


이게 무언가! 나는 가족들에게서, 마지못해 받아들여진 생명이었다는 것 아닌가? 


저항이 올라왔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생명이라 내 잘못이 아니다. 엄마의 잘못은 더욱 아니다. 내가 딸이라는 것에 거부받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화가 났다. 그 화는 한 동안 철없이 반항하던 고등학교 시절을 넘어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를 미워하는데 머물렀다. 


때때로 반항하는 나에게 엄마는 ‘할머니, 아버지에게 딸을 낳아서 떳떳이 미역국도 못 먹고 기죽어 살았다. 너까지 왜 힘들게 하냐’며, 나의 반항이 멈추기를 호소하며 말을 건네주시는데, 뜨거운 돌덩이가 입 밖으로 올라와 눈물이 흘렸다.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방울에 맴도는 엄마의 말에, 나도 모르게 ‘그럼 나를 낳지 말았어야지 나를 왜 낳아가지고 누가 기죽어 살래’라고 엄마에게 쏘아 부쳤다.


내 탄생이 엄마에게 빚진 것 같았다. 엄마에게 말을 건네는 것보다 불만 가득한 태도에 올가미 씌워 침묵으로 일관했다. 필요한 말에 툭툭 한 마디씩 던지고, 나 스스로를 죄인으로 조여드는 시간들이 흘렀다. 시간은 내 마음과 달리 휙휙 지나갔지만, 불쑥불쑥 '마지못해 태어난 생명은 없다' 생각 드니 살아가는 존재감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답은 아니었다. 


누구나 조상이라는 존재가 있어 태어나고, 엄마의 출산이 내게로 온 것을, 내 존재 수용에 풀리지 않은 마음이었다. 나 자신을 갉아먹는 괴로운 심정을 희석하고자 그걸 말하기 좋게 운명이라고 하던가? 그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스물두셋 정도였지만 완전한 동의는 아닌, 엄마와 나에게 좋은 묵언의 합의점이라고 보았다. 어른들 말을 빌어 심간(心肝) 편하게.

    



        ☸ 부모 시절에는 무엇 때문에 그리 딸이면 찬밥 신세였을까?


역사까지 논할 생각은 없다. 문외한이기도 하고, 나와 비슷한 연배 사람들은 거의 그러했다는 점도 있고, 세월이 달라졌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인간 존재 자체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지금도 그러한 점이 임금 차이, 직위 차이, 인식 차이가 남아 있는 사회의 흐름이 마음에 안 들었다. 여성운동가들이 들고 일어 난 이유를 알만 했다. 거기에 합세하여 인식을 바꿀 생각조차 못하고 묻어 산 세월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 엄마는 물론이고 나도 가족이나 타인들에게도....  기죽어 살다, 서른 중반에 눈 떴지만 육십을 달린다. 이제라도 기죽어 산 나를 발견한 것에 감사해야 할 판. 살아있으니!


스스로에게 더 놀라운 것은, 내가 태어남이 그러함에도 어느 생명에게는, 환영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간에서는 이를 흙수저, 금수저라고 획을 그어대며 존재감을 흔든다. 탄생은 공평한데 삶의 질로 구분 짓는, 사회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까지는 너무 멀리 간 것 같아 더는 말하지 않고자 접는다.


개똥철학으로 나의 존재를, 특히 타인들이 막 구분 짓는다고, 그 본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요, 관여는 더욱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아이의 울음을 듣고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나의 존재를 알리는 최초의 외침이며, 인정받는 순간이 된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 한가운데 내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딸이라는 이유로.




       ☸ 그래서 '생일을 챙기는 것이구나' 싶다.


  딸이라고 그 누구도 허투루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내 존재를 인정해주는 행위가 생일이다. 생일 때마다 먹는 미역국은, 나를 위한 것인지, 부모를 위한 것인지, 자라면서 투덜대며 따져 보았지만, 둘 다를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어릴 적 생일 미역국을 얻어먹기는 하늘에 별따기였다. 나의 집에서는 오빠들이 우선이었고, 가난도 한 몫했다. 

어릴 때는 그토록 먹고 싶었던 미역국을 내가 아이를 낳고 친정어머니가 끓여주며 매 끼니마다 먹으라 하여 곤욕을 치렀다. 소고기는 어쩌다 먹으니 꿀 맛이었다. 아쉬운 대로 들기름으로 달달 볶다가 끓인 뽀얀 미역국도 며칠은 속이 확 풀리며 맛있었다. 삼시세끼 미역국이 상에 올라오니 질려서 더는 안 들어가 물리고 말았다. 그랬던 미역국을 시간이 많이 흐르고 보니, 지금은 몸보신용으로 뚝딱 한 그릇 땀내며 먹기도 한다.


이 미역국을 무엇 때문에 그리 먹는가 하였더니, 아이, 산모 모두에게 출산을 기원하고 축하하는 의미도 있다 한다.  미역국을 먹는 것은 산모에게는 출산으로 축난 몸을 보충하는 한국의 건강한 밥상이었던 것이다. 생일을 기리는 미역국과 함께 한 존재로 인정받는 유일한 나 만의 날, 생일. 타인으로 인정받는 것과 함께 나 스스로도 인정하는 날이고 싶었다. 



-   시작   -


       ☸ 부모나 나나, 세상에 태어난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보는 것이 "존중"이다.


부모나 나나 다른 존재임을 아는 것이 나를 존중하는 첫발이었다. 나 스스로 나를 온전히 인정해주며 얻는 기쁨으로 느끼고 싶었다. 성인이 되고 자식을 낳고 사십쯤에 알았으니 대체 '나는 누구인가'의 의문에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없었던, 초등학교 시절로부터 해답을 얻고자 했던 시초가 되었다. 


나처럼 태어난 사람이든, 그러하지 않은 사람이든, 한 존재로 혼자 걷게 되는 시점까지는, 아이를 양육하는 사람, 주로 부모님이 되기는 한다. 온전하게 아이를 인정해준다. 아이가 젖을 먹도록 가슴을 내어주고, 아이가 먹고 싸놓은 똥도, 묻은 엉덩이도 깨끗이 치워준다. 몇 시간이 되었든 실컷 자도록, 가만가만 걷거나 말소리도 조용히 해준다. 온전하게 받아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내 던져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받고 자란다. 우리 모두가 그런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하지 않아 시무룩 해진 이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포함되기에 스스로에게 또 물었다.


내가 충분히 받고 자라야, 몸도 마음도 건강한 존재로 성장하건만, 나의 엄마는, 밭일하랴 시어머니 공양하랴 사는데 바빠, 나를 출산하고 다음 날부터, 퉁퉁 부은 몸으로, 밥을 짓고 밭일을 했다고 했다. 당신 몸이 힘들었기에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거의 기억에 없으시다 했다. 그냥 먹으면 자고 배고프다 울면 먹였다고 했다. 위에 두 오빠가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고도 했다. 


5,6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의 환경은 대체적으로 가난에 먹을 것이 적었고, 배움을 접하기보다는 먹고사는 것에 쏟아붓기 급급했고, 가난을 벗어나고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다고 했다. 정서지원은 꿈도 못 꾸는 시절이었다는 것. 나의 탄생만이 아닌 내가 만난 내 또래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니 이 영향을 받아 아픔이 있는 편이었다.


이 아픔들을 각자 개인이 감당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사회문화와 주어진 환경을 보기보다 개인의 문제로 보았기에 나는 늘 문제가 있는 존재로 아이답지 않은 독특하다는 취급을 받았다. 나의 가족과 나는 자주 삐그덕 거렸으니, 부모의 존재와 나의 존재를 좀 더 독립적으로 이해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아쉬운 것이다. 어떠한 모습으로 있든 존중을 받는 경험을 하였다면 나의 능력은 더 많이 발굴되었을 것이라 확신하는 것이다.




       ☸ 엄마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처음, 아이는 세상이 처음.


부모는 아파도 아이들은 자란다. 그래서일까 어른들이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무럭무럭 자란다고 표현한다. 낳기만 하면 알아서 큰다는 말을 어른들은 했다. 내가 그에 따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알아서 컸지만 성장하면서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싫다고 고집을 피우니 얻어맞기 십상이었다.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가다가도 해찰을 잘해 꿀밤을 달고 살았다. 나를 존중하는 것이 무엇인지 받아 본 적이 없으니 모르고 자랐다. 나의 부모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행동을 관찰하며 닮아가고 익혔다. 나도 내 부모가 하는 대로 따라간 셈이었다. 그 환경 속에서는 나의 생각이 만들어질 리가 없었다. 잘 따라 해야 효도 소리를 들었기에 창의성은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순수히 따라 간 적이 없으니 나는 고집이 센 아이였다. 


어릴 때 적어도 초등학교 전까지 나의 엄마와 내가 잘 맞았는지는 알 수 없다. 엄마의 기억을 빌어보면, 나는 세 번째로 키우는 아이였으니 엄마에게는 좀 더 수월 했다고 하였다. 엄마 입장에서는 딸이어서 조금은 시부모님 눈치가 보여 내가 울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고 하셨다. 어찌 보면 나는 젖먹이 때는 순한 아이이기도 했지만 방치되었던 아이였다. 


성인이 되어서 사람들과 대화에서 멍하니 듣고 있는 내 모습을 볼 때, 상대의 감정과 다른 감정표현을 할 때, 정서적 접촉이 느껴지지 않아 깜짝 놀라는 때가 있었다. 외로움을 달고 살고, 무던히 잘 참는, 내 자식들과 따뜻하고 살가운 엄마는 아니었던, 내 삶을 지배하였던 것을 찾아 정리하여 볼 때 영아기의 환경은 무관 하지 않았음을 이해하였다.


내가 엄마에게 받지 못했던 것은 까맣게 잊었을까? 어쩌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었을까? 내 딸에게도 정서적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부모가 된 내가 내 아이를 키우면서는 몰랐다. 양육자의 관심을 충분히 받아 본 경험이 없는지라, 그 감정을 알지 못하니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키웠던 것 같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딸이 결혼하여 자신의 딸을 키우는 것을 옆에서 보니 내가 참으로 메마른 엄마였다는 것, 확연히 알아봤다. '참 무딘 엄마였구나'를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아이의 행동이 새삼스럽고 신통방통 신기했다. 할머니들이 이래서 '자식보다 손주 사랑이라 하는구나' 싶었다. 아이는 세상이 처음이니 신기해서 천방지축이다. 아이의 행동이 어찌해서 그런지 내 눈에 들어오니, 손주가 하는 대로 따라가 보라고 딸에게 코치를 해봤다.  내 눈에는 새록새록 변화하는 손주 성장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감탄을 금치 못하지만, 엄마인 내가 쉬워 보이는 것이지 딸은 어려워했다. 일부는 따라 해 보지만 잔소리이요, 아이 발달 이해를 버겁게 느낄 때가 많은 듯 보였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맞닥뜨려해 내야 하는 사람은 손자와 내 딸인 것이다. 허니 지금도 딸이 그냥 하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쯤은 이제 나도 알아냈다. 내가 엄마가 처음이어서, 서툴게 딸을 키운 탓에 나에게서 배운 정서로, 손주를 양육하는 것이니 지켜보는 것이 맞다. 한 존재로 보려면 여기서라도 멈춰주는 게 맞다. 난, 부모니까. 다행인 것은 딸은 나보다 아이에게 귀 기울이려 하고, 살갑고 친절하게 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처음임에도 나 같지 않게 잘한다는 것이 나를 위로한다.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은 소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