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질 I - 육아 난이도 (5. 자립형 공립 초등학교)
미국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다니면서 현지에서 교육받은 친구들을 사귀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됐다. 유명 대학을 나온 친구들 중 상당수가 어릴 때부터 사립학교를 다녔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미국의 공교육은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편견을 갖게 됐고, 아이의 첫 미국 데이케어 경험을 통해 교육도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철저히 움직이고, 결국 비쌀수록 더 좋은 교육 환경이 보장 될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졌었다.
하지만 막상 아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질 좋은 사립학교에 보내거나 학군이 좋은 지역의 높은 렌트비를 감당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었고, 때로는 내가 무능한 것만 같아 이민자의 삶을 선택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미국의 교육 시스템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결국 직장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안전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렌트비 내에서 교육구 평점이 높은 곳을 찾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운 좋게도 집에서 가까운 자립형 공립학교에 배정받게 됐고, 뜻밖에도 이 학교 덕분에 내가 가졌던 오랜 편견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자립형 공립초등학교는 일반 공립학교처럼 주 정부의 지원을 받지만, 주 교육국의 각종 규정과 규제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학교의 자율성이 강조되는 형태의 공립학교다. 설립 배경을 조사해보니, 원래 학업 성취도가 낮은 공립학교를 보완하기 위한 대안학교로 시작되었다고 하니, 내가 처음 가졌던 선입견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나 보다.
Charter school은 교사와 학부모가 주축이 되어 운영된다. 그래서인지 추첨을 통해 배정된 순간부터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모임이 시작된다. 첫 모임에서는 학교 소개와 투어가 이루어지고, 학부모의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된다. 또한, volunteer signup form을 통해 부모가 아이의 학습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모의 역할을 독려한다.
이러한 부모 참여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뿐만 아니라, 부모 역시 자연스럽게 자녀의 교육에 더욱 관심을 갖게 만든다.
실제로 이 학교의 평점과 학업 성취도는 같은 주의 다른 공립학교들에 비해 월등히 우수했다. (학교에 대한 평가는 US News 또는 GreatSchools를 통해 비교해볼 수 있다.) 또한, 교육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유치원(Kindergarten) 과정에서는 기초 학업뿐만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중요한 규칙과 가치관을 배우는 "Moral Focus"라는 주제를 강조하며, 다양성 속에서 서로 돕고 어울리는 법을 가르친다. 이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덕분에 처음에 가졌던 우려와 ‘사립학교에 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또 미국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없고 아이를 상대로 영어로 소통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학부모 활동에 최대한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학교가 교육에 쏟는 열정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마음을 열게 되었다. 게다가 같은 학년에 한국인 가정이 우리 아이를 포함해 단 두 가족뿐이었기에, 교육열이 높은 한국인으로서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다양성(Diversity)’과 관련된 행사에서는 아이가 미국에서 자라면서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밤을 새워 준비하며 다문화 행사에 열정을 다해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사실 이곳에 오게 된 계기는 직장이었다. 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회사 문화 때문에 결국 6개월 만에 스스로 퇴사를 결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직장만 생각했다면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떠났을 이 도시는 아이에게 좋은 교육 기회를 준 학교 덕분에 쉽게 떠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안타깝게도 아이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곧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한다. 하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미국의 공교육을 한 번 믿어볼 수 있게 되었다.
6세까지 한국과 미국에서 육아를 경험을 통해 육아에 대해서 요약해 본다면, 단순히 육아의 난이도만 놓고 보면 비슷하지만, 전반적인 환경을 고려하면 미국이 훨씬 더 힘든 것 같다. 특히 맞벌이 부부를 위한 시스템 및 "서비스"적인 교육환경이 한국보다 잘 갖춰져 있지 않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애초에 국가나 사회적 인프라에 대한 기대감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주변에 가족이 없고, 기존의 경험 없이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이민자의 입장에서는 그 어려움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의 공백 덕분인지 아이와 부모가 어쩔 수 없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래서인지 학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이가 더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힘들지라도 아이는 행복할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