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학원 졸업 후 5년의 황금기를 알지 못했던 나
부끄럽지만 변명을 하자면, 대학원 졸업 후 대기업에 쉽게 취업하거나 바로 교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도교수는 유럽 국비 장학생으로 MIT에서 재료공학 학회에서 골드메달을 받고 졸업한 후 미시간 대학 교수가 되었고, 주변 선배들 역시 졸업 전에 이미 대기업 오퍼를 몇 개씩 받아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나의 차이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아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졸업은 곧 성공으로 이어질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학위를 딴 뒤에는 여유롭게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운 좋게도 해당 분야에서 톱 3 안에 드는 대학에서 포닥(Postdoc) 자리를 얻어 미국에서의 생활을 연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향수병이 찾아왔고, Korea Research Fellowship으로 3년간 한국에서 연구한 후 육아휴직 겸 6개월 동안 쉬었다. 이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미국 국가 연구소 포닥 자리에 지원했고, 그때 처음으로 "졸업 후 5년룰(5-Year Rule)"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졸업 후 5년은 연구자로서 나의 역량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이 시기는 대학원 과정보다도 더 중대한 시기였다. 운이 좋게도 당시에는 5년이 지나지 않아 나를 다시 증명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지만, 팬데믹으로 상황이 복잡해졌다. 이제 막 1살 된 아이와 함께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혼자 이사할 수는 없어서, 남편 직장에서 통학 가능한 대학교를 선택해 지원했다.
그러나 국가 연구소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했던 "5년 규칙"이 사실은 톱 티어 대학들에서도 엄격히 적용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게다가 팬데믹으로 행정 처리가 지연되면서 5년의 마지노선을 넘기게 되었고, 결국 오퍼가 취소되었다. 이때 비로소 졸업 후 5년이 왜 연구자에게 황금기인지, 그리고 그 중요한 시기를 어떻게 허비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우선 대학원에 가는 이유를 명확히 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고, 경쟁의 결과물이기에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갔다고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내가 그랬다.) 내가 가는 길의 끝은 어디인지, 어디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길을 잘 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사실 연구자로서 이제 본 게임이기 때문이다.
재료공학 박사학위자로서 경험한 바로는, 내가 간 자갈길을 걷지 않기 위해서는 대학원 진학 중에, 최대한 빠르게 대학원 졸업 후의 진로를 정하고 그에 맞게 연구 주제, 방법, 과정 속 성과를 전략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대부분의 전공자들은 대학원 졸업 후 두 가지 진로 중 하나를 선택한다: Industry 또는 Academia.
Industry: 연구 주제에 따라 다르지만, 포닥 경력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바로 졸업한 신입일수록 더 많은 오퍼를 받는다. 깊이 있는 한 가지 연구보다는 폭넓은 연구 경험을 선호한다. 회사는 배경지식이 검증된 지원자를 합리적인 연봉으로 데려와 회사 기술에 맞게 성장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Academia: 박사 때 연구로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면, 유명 연구실에서 최대 3년간 포닥 기간 동안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이고 현실적인 연구 계획안을 준비해야 한다. 미국에서 교수직을 지원하려면 비자 문제를 해결할 영주권 준비가 필요하다. 만약 한국 대학 교수직을 목표로 할 경우 최근 3년간의 연구 실적이 중요하기 때문에 박사 과정에서 논문이 나왔다면 포닥 시작과 동시에 교수직 지원을 병행해야 한다.
졸업 후 아무 준비 없이 희망회로만 돌리다가 현실의 자갈길에 부딪혔다. 육아휴직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큰 돌덩이가 되었고, 포닥 자리는 계속 최종 후보에서 밀려났다. 무려 1년 동안 5곳의 최종 면접에서 탈락한 끝에, 대기업 경력직 공채 지원으로 겨우 경력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발로 차며 나아갔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그 시간 동안 지원서, 면접, 기다림으로 보낸 노력은 이력서에 남지 않는다. 공백으로 남는 기간을 채우기 위해 그때 작은 활동이라도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예를 들어 관련 분야 자격증을 따거나, 성과를 남길 수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등 말이다. 이 깨달음은 이후 정리해고와 자진퇴사를 겪으며 또 다른 공백기를 경험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