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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Jun 10. 2024

아마도 캐나다에서의 마지막 여행, 토피노 #2

대자연 토미노에서의 태교 여행 둘째날

  밴쿠버에 와서 첫 한달을 머물던 주택의 주인 아주머니가 토피노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캐나다의 하와이라 불린다고 하면서 가보라고 추천을 해주셨다. 그 때 찾아본 토피노 롱비치의 16km나 뻗어 있는 백사장과 바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1시간 걸려 페리 선착장에 도착해서 2시간 동안 페리를 타고, 페리에서 내려서도 3시간을 더 들어가야해서 캐나다 사는 2년 동안 여행 후순위로 밀리고 밀리다 귀국 직전 향하게 되었다. 어쩌다보니 임신 중기의 태교 여행지가 된 토피노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깊었다. 캐나다 서부, 밴쿠버 근방의 키가 크고 빼곡한 침엽수 숲과 푸른 바다와 너른 호수에는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대자연에는 단 2년 머무는 것만으로는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었나보다.


  작은 마을 포트 알버니의 에어비앤비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1시간 반 거리의 토피노로 향했다. 어제 농산물 장터에서 샀던 복숭아랑 치즈 식빵으로 맛있는 아침을 먹고 토피노로 가는 길, 하늘은 파랗고 쭉 뻗은 침엽수는 속이 시원했다. 가는 길 옆에 펼쳐진 호수는 밴쿠버에서 언제나 보던 크고 아무것도 없는 자연의 모습이었다. 한국의 호수나 강가에는 보통 편의시설이나 카페, 식당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캐나다는 너무 땅이 넓어서 관광지가 되지 않은 호수가 많다. 온전히 자연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호수변을 드라이브하는 건 그 자체로 즐거웠다.


  숙소는 토피노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우클루렛이라는 작은 마을에 잡아두어서 우클루렛의 다운타운으로 들어섰다. 말이 다운타운이지, 차로 10분이면 다 돌아볼 것 같은 작은 마을. 배고파하며 구글 지도를 살펴보니 평점 4.9점의 브런치 가게가 있길래 그곳으로 향했다. 별 계획 없이 들어선 브런치 가게에서 샥슈카와 몬트리올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맛있어 보이는 브라우니를 하나 골랐다. 알고 보니 그 브라우니는 나나이모바 였다. 이 곳 밴쿠버 섬에서 난 유명한 디저트였다. 커피가 들어간 나나이모바는 은은히 달아 기분이 좋았고, 신선한 토마토를 각종 향신료와 볶았다는 샥슈카는 내가 상상했던 에그인헬(한국에서 한 때 샥슈카가 에그인헬이라는 이름으로 유행을 했다)과 다른 요리였고 너무도 맛있어서 행복해졌다. 요리를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어떤 재료를 어떻게 조리했길래 이렇게 신선하고 산뜻한지 궁금해하면서, 요리 안에 들어있는 고수의 씨앗을 발견하면서 맛있게 식사를 했다. 기분 좋은 여행지에서의 낯선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근처에서 제일 유명하고 쉬운 트레일이라는 레인보우 트레일로 향했다. 북미에서는 올트레일이라는 앱이 많이 쓰이는데 국립공원의 각종 트레일에 평점이 매겨져 있고, 난이도와 소요시간, 리뷰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걷고 싶은 트레일을 고르기가 쉽다. 레인보우 트레일에 도착했을 때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어서 챙겨온 패딩을 입고 비니를 쓰고 숲 속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순식간에 쥬라기공원이나 트와일라잇에 나올 것 같은 숲이 눈 앞에 펼쳐졌다. 밴쿠버의 주립공원과 비슷한 듯 달랐다. 나무는 훨씬 크고 두꺼웠고, 이끼로 뒤덮여 신비롭고 비밀스러웠다. 태풍으로 쓰러졌을 나무들은 새 생명으로 뒤덮여있었다. 걷기 쉽도록 나무 데크가 깔려 있었는데, 데크가 좁고 구불구불하며 오르락 내리락 이어지고 있어 마치 미지의 숲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쉬운 트레일이라기엔 오르락 내리락의 반복이 자주라서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대자연에 압도되어 감탄만 나왔다. 캐나다 서부는 이미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캠핑장도 있는 주립공원만 다녀봤지 좀 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고 있는 숲은 달랐다. 그렇지만 이곳도 유명하고 접근성이 높은 곳이다. 왜 사람들이 정글 탐험을 하고 인간의 손이 덜 닿은 곳에 가보고 싶어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내내 감탄하며 한 시간 남짓 걸으며 이만큼 걸을 수 있는 체력을 쌓아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하마터면 이렇게 좋은 곳을 걷지 못할 뻔 했다.


  2년 간 캐나다에 살면서 다녔던 트레일 중 손에 꼽게 인상 깊었던 트래킹을 마치고 에어비앤비에 도착했는데 호스트와 연락이 되질 않았다. 셀프체크인 방식이지만 비밀번호를 안내 받지 못했는데. 메세지를 남기고 전화를 해도 답이 없기에 밖에 놓인 안락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신기했다.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숙소도, 식당도, 교통편도 모두 미리 알아보고 여행을 다녔던 나는 과거가 되었다. 호스트가 1시간 째 연락되지 않는 상황이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 살면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럴 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이 내게 좋다는 것도. 1시간이 조금 지나서 호스트에게 연락이 왔는데 에어비앤비에서 자동으로 안내되는 체크인 관련 메세지가 전송이 되질 않았다고 했다. 그럴 수 있지. 미안해하는 호스트에게 괜찮다고 하고 2층의 숙소에 들어섰는데 넓은 거실과 주방에는 기다란 창문과 큰 창문이 있어 밖의 하늘과 나무가 그림처럼 걸려 있었고, 침대는 무척 푹신했다. 감각적인 인테리어의 숙소에 기분이 좋아졌고, 토피노에서는 해변의 일몰을 봐야하는데 일몰은 밤 10시고 임산부인 나는 1시간 걸려 숲 속을 걷느라 조금 지쳐서 저녁 8시쯤 다시 나가기로 하고 쉬었다. 컨디션에 따라 적절한 휴식을 취할 줄 아는게 우리 부부가 여행 메이트로 잘 맞는 이유 중 하나다.



  편히 쉬다가 일어나 간단히 저녁을 먹고 있는데 호스트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고는 미안하다면서, 몇 년 동안 이런적은 처음이라면서 와인을 주었다. 우리는 괜찮다 웃으며 얘기했고, 호스트는 떠나고 나서도 메세지로 이해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전전긍긍했을 호스트에게 진심으로 괜찮다고 할 수 있어서 마음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건 내 마음이 좋아지는 일이다. 


  여유로워진 몸과 마음으로 롱비치의 일몰을 보러 숙소를 나섰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20분 정도 달려 롱비치에 도착했다. 서핑 성지인 롱비치의 5월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여름이면 바빠질 길고 긴 백사장의 봄. 깨끗하게 펼쳐진 모래와 잔잔하게 철썩이는  파도, 수채화로 물들인 듯한 넓은 하늘. 무늬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의 둥근 달까지. 고즈넉한 풍경에 우리는 잠시간 말을 잃었다. 말 없이 너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모래 위에 우리의 이름과 하트, 그리고 아가의 태명을 적었다. 바다에 오면 언제나 남편과 내 이름을 쓸 뿐이었는데 우리의 이름 사이에 다른 이름을 쓰게 되다니. 상상해본 적도 없는 행동을 하면서 뭉클하고 따뜻하게 행복했다. 낯설고, 어딘가 쑥스러우면서도 행복한 기분.


  해가 산 뒤로 넘어간 후 물감 번지듯 어둡게 물들어가는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걷다가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에는 커다랗고 둥근 달이 내내 앞에 떠 있었고, 둘이 함께 본 달 중 가장 크고 선명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여행 둘째날을 마쳤다. 어딜 가나 사람이 별로 없어 차분히 대자연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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