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바다가 있는 곳에 살고싶었다. 서울에 살면 바다는 여행 가야만 볼 수 있었는데,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하고, 평일에도 주말에도 언제든지 해변을 산책하고 수영할 수 있는 점이 좋아보였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부동산 앱의 지도를 켜놓고 아직 유명해지지 않은 동해 마을들의 땅 매물을 둘러보기도 했다. 지금은 바다 근처에 살 수 없고 돈도 없지만 혹시 미리 땅을 사놓으면 수십년 후 은퇴할 때 쯤 그 땅에 집을 짓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사실 땅을 사는 것에 대해서도, 집을 짓는 것에 대해서도, 집을 지으려면 얼만큼의 땅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앗,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네' 라는 생각으로 끝내기는 했다.
그런데 우연히 밴쿠버에 오게 되어 생각보다 일찍 바다 근처에 살아볼 기회를 얻었다. 밴쿠버에 와서 제일 처음으로 가본 곳도 키칠라노 해변이었다. 밴쿠버 해변이 한국과 다른 점은, 해변이 너른 잔디와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운 백사장은 없거나 좁고, (있으면 발리 볼하는 사람들로 빼곡하다) 푸른 잔디와 캐나다의 키 큰 시다나무들이 자리해있다. 우리는 자주 해변 공원에 나가 잔디 위에 피크닉 매트를 깔고 도시락을 먹고 책을 읽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주말에는 근처 공원에 나가 잔디 위에 누워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토록 궁금했던 바다에 살게 되어도 똑같이 잔디 위에서 먹고 마시고 읽다니, 눈 앞의 풍경에 바다가 더해지고, 옆에는 비둘기가 아니라 갈매기가 걸어다니는 것만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그토록 궁금해하던 바닷가에서의 삶은 별로 다를 것이 없을까 싶어 처음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내가 이곳에서 지내며 정말이지 좋아하게 된 것. 해가 질 때 물드는 하늘과, 주홍빛의 윤슬이 빛나는 바다의 물결. 산 뒤로 넘어가는 일몰을 보는 것도 멋있었지만, 바다에서 보는 일몰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밝은 해가 바다에 가까워질 때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안에서 멀리까지 이어진 윤슬의 길을 바라본다. 그 순간에는 파도의 소리, 갈매기의 울음 소리뿐이다. 동그란 해가 바다에 닿으면, 그 때부터 넘어가는 것은 5분이 채 안걸린다. 전에는 해가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지 몰랐다. 짧은 시간동안 해는 움직이는지도 모르게 사라지고, 그러면 눈부시게 빛나던 윤슬도 일순간 사라진다. 하지만 또다른 아름다움을 눈에 담을 수 있다.
해가 지고 나면 하늘이 주황색, 분홍색, 연보라색으로 물든다. 바다도 함께 물든다. 해가 지고 나서도 바다에 머물면, 시시각각으로 다르게 물드는 하늘과 바다와, 다른 모양의 구름을 볼 수 있다. 전에도 여행가서 일몰을 보면, 일몰의 특별함에 감탄하고는 했지만 여행의 순간이었기 때문에 다른 기억할것이 많아 그 모습이 오래 남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 살면서 자주 일몰을 보다보니, 매일 보는데도 특별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일렁인다. 왜 외딴 마을에서 매일 자연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시인이 되었는지 알 것 같다. 매일 볼 수 있는 자연의 모습에는 매일의 특별함이 있고, 그 아름다움이 너무도 좋아서 무엇이라도 표현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자주 일몰의 모습을 그림으로도 그리고, 이렇게 글로도 쓴다.
이곳을 떠나게 되면 한동안 바다 근처에는 살 수 없다. 해가 지는 시간, 한시간에서 두시간 남짓한 고요와 경외의 시간을 오래 오래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