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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Sep 27. 2023

없어도 되는 가구 목록

침대 서랍장 붙박이장 소파 TV

  12평 집에 둘이 산지 어느덧 5개월이다. 처음 이사한 날엔 집이 너무 좁아 짐을 다 들일 곳도 없어 막막했었는데 이 집에서 여러 일을 겪으면서 너무도 충분한 공간이 되었다. 약 한 달 동안 차박 로드트립을 하고 돌아왔을 땐 중형 SUV의 뒷자석을 접어 자다가 방에서 잠을 자니 너무 넓게 느껴졌다. 침대와 선반 사이에 한 사람만 겨우 지나다닐만큼의 통로만 남는 작은 방인데도 몸을 뒤척일수도 없던 차에서 생활하고 오니 전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친정 식구들이 놀러와 일주일 동안 우리집에서 지냈을 때는 엄마가 침대에서, 동생 둘이 각각 선반과 침대 사이, 침대 머리맡과 벽장 사이에 누웠다. 해리포터가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잤던거라며 지내던 가족들이 돌아가고 나니 또 다시 둘이 살기에 이 집이 너무 쾌적하게 느껴졌다. 시부모님이 열흘 간 놀러오셔서 지내실 때는 주로 외식하던 친정 식구들과 달리 집밥을 자주 먹었는데, 2인용 정사각형 식탁을 소파 앞으로 옮겨와 원래 있던 의자 2개, 컴퓨터 의자, 소파에 앉아 넷이 밥을 먹었다. 나랑 남편이 캠핑용 자충 매트를 깔고 자던 거실에선 아침이면 이부자리를 치우고 넷이 밥을 먹고 식탁을 다시 옮기고 저녁이면 다시 식탁을 옮겨 넷이 밥을 먹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거실이 얼마나 넓게 느껴지던지, 2인용 작은 식탁이 둘이 식사하기에 어찌나 충분하게 느껴지던지, 지난 6년간 8인용 식탁만 써왔던 우리가 2인용 식탁이 충분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한국에서 밴쿠버로, 밴쿠버에서 4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나와 남편은 자주 없어도 되었는데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물건들을 이야기 한다. 그 중 큰 가구들의 없어도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1년 후 한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꾸릴 보금자리의 자유로움을 상상하며 즐거운 대화를 한다.


 첫째, 침대


 15살 때 처음으로 내 방이 생기면서 침대를 갖게 되었다. 그 후로 침대 없이 생활한 적이 없다. 자취방도 풀옵션 원룸에서 살았기에 침대가 있었고 결혼할 땐 가로 세로 2m 2m인 킹사이즈 매트리스를 들였다. 처음 사게 된 침대 프레임이 생각보다 비싸서 파레트형 접이식 침대 깔판을 두개 놓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올려 썼다. 15살 이후로 처음으로 누군가와 같이 자게 되며 편안하게 자고 싶어서 큰 맘 먹고 커다란 매트리스를 들이면서 신혼집 안방에 그 매트리스가 들어가는지 확인하려고 계약한 집에 다시 가서 방의 사이즈를 다시 재왔다.

  그런데 캐나다에 와서 캠핑을 하고 차박을 하고 가족들을 집에 모시며 거실 바닥 생활을 해보니 침대가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텐트나 차 안에 자충 매트를 깔고 침낭에서 자도 잘 잤고, 거실 바닥에 그 자충 매트를 깔고 자도 잘 잤다. 아침이면 자충 매트와 침낭을 정리하고 하루를 시작했고, 거실에서는 자충 매트와 이불을 대충 접고 소파 위에 올려두었는데(치울 다른 공간이 없다), 이부자리를 준비하고 치우는게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뿐더러 생활 공간이 이부자리만큼 넓어졌다. 신혼집에 킹사이즈 침대가 없었더라면, 가로 세로 2m만큼의 공간이 더 있었던 것이다. 넓은 방에서 지낸다면 침대가 있어도 상관 없겠지만 만약 그리 넓은 방이 아니라면 요와 이불을 깔고 생활했던 할머니 할아버지네 집처럼 지내면 공간이 넓어 좋을 듯 하다.


  둘째, 서랍장과 붙박이장


  친정집 거실 한 면과 안방 한 면에는 커다란 장롱이 있다. 신혼집 안방 한 면에는 전에 살던 사람이 짜놓은 붙박이장이 있었다. 친정집에는 엄마와 딸 셋의 옷이 너무 많아 장롱이 꼭 필요하다고 여겼는데 외국에 가기 전 엄마가 정리하고 가라 해서 들러 열어본 장롱 안의 내 옷은 아무것도 입을 게 없었다. 5칸의 옷장 중 1칸을 통째로 비우고 왔다. 신혼집의 붙박이장도 꽉 차 있었고 방 하나는 두 면 가득 행거를 설치하고 서랍장을 두어 옷 방으로 썼는데 출국하며 옷 정리를 하고 외국에 나와 1년을 살아보니 그만큼의 옷이 필요가 없다. 외국에 나오며 10박스의 짐을 배로 보냈는데 이 곳에서 4번의 이사를 하고 12평 집에 정착하면서 그 짐을 둘 곳이 없어 빠르게 미니멀라이프를 경험하면서 커다란 서랍장과 붙박이장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이 든다. 지금 이 12평 집에는 방 한 켠에 행거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곳에 둘의 사계절 옷 전부와 가방, 커다란 캐리어 3개, 계절용품(튜브 등) 등이 모두 수납되어 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는 옷도 전부 수납할 수 없었는데 옷과 짐을 정리하며 충분하게 생활하고 있다. 신혼집 붙박이장에는 이불이 많았는데, 외국에서 최소한의 이불로 지내보니 하나의 이불을 쓰다가 아침에 세탁과 건조를 마치면 다른 이불을 꺼낼 필요가 없고, 한국에서 쓰던 가볍고 질 좋은 차렵이불 하나로도 4계절을 부족함 없이 지낸다. 봄가을 여름 겨울 이불을 계절 별로 몇개씩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셋째, 소파와 TV


  거실에는 으레 있어야 할 것 같은 소파와 TV. 나는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서 앉은 자리에서 몇 편이고 드라마를 볼수 있고, 집에 살 땐 계속 채널 돌리기를 하며 TV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그 생활을 바꿔보려고 결혼할 때 신혼집 거실에 소파와 TV를 두지 않았다. 대신 LG의 미니빔프로젝터와 이케아의 안락의자 2개를 썼다. 그 덕에 24평 신혼집의 좁은 거실을 넓게 쓸 수 있었다. 우리집에 놀러온 사람들은 다들 거실이 넓어서 좋다고 했다. 사실 넓지 않았는데 TV도, TV장도, 소파도 없으니 넓어 보였다. 빔프로젝터로 보고 싶은 영상만 크롬캐스트로 연결해서 보기에 멍하니 채널 돌리기 하는 시간이 줄었고 안락의자에서 나름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눕지 않고 지냈었다. 그러다가 지금 12평 집에서 5년만에 TV와 소파를 쓰니 이 가구들은 없는게 우리에게 더 좋은 것 같다. 소파는 이 기숙사에 원래 있는 물건이고 TV는 귀국하는 친구가 아주 좋은 커다란 스마트티비를 좋은 가격에 티비 장과 함께 넘겨준다기에 받았다. 안락의자에서 앉아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던 우리는 이제 소파에 최대한 누워서 본다. 2인용소파와 1인용 소파가 함께 붙어있는데, 이 불편하고 작은 소파에서 요상한 자세로 눕거나 기대어 있느라 목이나 어깨가 아프다. 안그러려고 하는데 소파는 왜이리 사람을 눕게 만드는지, 의지력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TV 화면이 너무 생생하고 좋아서 자꾸만 드라마와 영화를 본다. 빔프로젝터를 쓸 때에는 낮에 밝을 때 화면이 보이지 않아서 밤에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주말 아침이나 낮에는 책을 읽거나 바깥 활동을 했다. 어두워진 후 맥주나 하이볼 한 잔에 영화를 보는 맛이 있었다. 그런데 TV를 쓰니 오전에도 낮에도 자꾸만 닌텐도로 게임을 하고 드라마를 본다. 의지력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귀국하면 어차피 없는 TV와 소파를 사지 않을 것이다.   

 


   집을 상상하면 필수품처럼 있는 커다란 가구들만 생각해봐도 없어도 괜찮다. 자잘한 생활 집기들은 더욱 그렇다.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던 우리가 좁은 집에 살 수밖에 없어 미니멀라이프를 연습할 수 있다는게 오히려 앞으로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무리한 대출로 집을 넓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수백만원씩 하는 가구와 가전을 사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물건들을 들이고 쓰는 시간을 여분으로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간과 비용으로 우리의 삶을 즐겁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기분 좋은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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