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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Oct 25. 2023

물건 비우는게 좀 쉬워졌네!

12평 좁은 집에서 계절이 바뀌어 물건 정리를 하며 느낀 점

  맨투맨 한장을 입고 집을 나섰는데 몸이 와들 와들 떨렸다. 눈 깜짝할 새 붉은 잎들이 낙엽이 되고 옷깃을 여며야 하는 계절이 왔다. 히트텍, 비니, 기모 후드를 꺼낼 때이다. 집에 돌아와 하나 있는 방 한켠의 행거를 보는데 아끼는 기모 후드가 보이지 않았다. 옷이 다 여기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없는걸 보니 있을 곳은 침대 밑 뿐이다.


  지난 5월 20평 2층집에서 12평 집으로 이사오면서 갑작스럽게 물건을 비우고 좁은 집에서 끙끙거리며 수납을 했는데 두꺼운 옷을 담아두었던 이불 봉투 하나가 침대 밑 이불 사이에 들어가 있었다. 서양인의 기준에 맞춰진 침대 프레임이 너무 높아서 처음엔 침대에 오를 때도 허벅지 근육을 쓰며 기어 올라가는게 힘들고 굴러 떨어지면 뼈라도 부러질까 걱정이었는데, 높은 프레임 덕에 침대 밑에 기어 들어가서 앉아 있을 수 있을만큼의 공간이 있어 부족한 수납에 유용했다. 그런데 이 좁은 집에서도 또 다시 무슨 물건이 있는지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다용도실, 붙박이장 같은 공간이 있다니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침대 밑 이불봉투 정리의 날이다.


  이불 봉투를 꺼내어보니 두꺼운 옷이 담겨 있는 봉투가 하나, 목도리나 히트텍 담요들이 담겨 있는 봉투가 하나, 차렵 이불이 담겨 있는 봉투가 하나, 극세사 이불이 담겨 있는 봉투가 하나가 나왔다. 하나 하나씩 꺼내보니 비워야 하는 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차렵 이불은 가장 아끼고 촉감 좋은 것을 지금 쓰고 있다. 한국에서 여름 방학 때 놀러온 가족들을 위해 남겨놓은 이불은 이제 쓰임을 다했기에 비운다. 극세사 이불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겨울 이불이니 남긴다.

 

  담요 역시 예쁘고 촉감 좋은 것이 지금 소파 위에 놓여 있다. 회사 기념품이나 사은품으로 들어왔던 회색 체크, 자주색 담요는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아 사용할 때 특별히 좋지는 않으니 비운다. 얇은 무릎 담요는 너무 얇아 보온의 제 기능을 잘 하지 못하니 비운다. 화이트 침구 꾸미기용으로 샀던 아이보리색 린넨 블랭킷은 여기서 소파커버 대용으로 쓰다가 이제 더는 쓰지 않으니 비운다.

  

  두꺼운 옷 중 줄어들어 편안하게 입지 못하는 옷은 비운다. 나머지 4년 넘게 입은 기모 후드들은 예쁘고 따뜻하고 아직도 짱짱하니 잘 꺼내 놓는다. 히트텍은 맨투맨이나 셔츠와 함께라면 겨울 옷이 부족하지 않으니 잘 꺼내 놓는다. 단 두개만 남겨 놓은 목도리는 외투 색깔에 따라 번갈아 써야 하니 계속 남긴다.


  이렇게 명확하게 보이는 '비움'과 '남김'인데 왜 5월 이사 중 발 디딜 틈도 없는 좁은 집에서 대대적으로 짐 정리를 할 때 또 다시 침대 밑으로 숨겨놓은 것인지 잠시 스스로가 이해 되지 않았다. 하긴, 나는 지금 미니멀 어린이니까! 밴쿠버에 와서 1년 동안 4번이나 이사를 하면서 허겁지겁 물건을 줄여온 것 뿐이지 그 과정이 매번 어려웠고, 그 때는 명확하게 이 물건들을 쓸 것인지 비울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집에 정착해 살면서 반 넘게 줄인 옷으로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고, 줄인 물건 덕에 청소 시간이 현저히 줄고, 긴가민가 고민하다 둘 곳이 없어 비웠던 물건들이 전혀 생각나지도, 아쉽지도 않다는걸 6개월째 깨달아 가면서 판단이 쉬워진 것 같다. 미니멀한 삶이 내 성향에 맞다. 그리고 천천히 그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


  두꺼운 옷을 침대 밑에서 꺼냈지만 방 한켠 옷이 모두 수납되어 있는 행거에 놓을 자리가 없었다. 12평 짜리 집에서 두 사람이 캠핑과 음악이라는 취미를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우선순위가 밀리는 다른 물건을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여름 옷을 다시 침대 밑으로 넣는건 물건 정리를 또 다시 다음으로 미루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여름옷들을 살펴 보았다. 옷을 반이나 줄였는데도 올 여름에 입지 않았던 옷들이 보였다. 나는 어차피 촉감 좋고 나에게 색이 제일 잘 받고 핏이 예쁜 같은 옷들만 계속 입는 사람이다. 지난 여름 안입은 옷들과, 공용 세탁기와 건조기를 쓰느라 줄어들어 짧아진 바지들을 꺼냈다. 그러니 공간이 충분했다.


  이불과 담요들은 중고거래 단톡방에 올리니 금새 주인들이 생겼다. 몇 달이나 쓰지 않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던 물건들은 추워진 계절에 다른 사람들에게 제 쓰임을 다 할 것이다. 옷들은 주인을 찾는 것이 어려워서 비움 바구니에 넣어두었다. 조만간 남편에게도 옷 정리를 하라고 한 후 기부 센터에 가져다 주고 와야지.


  이렇게 계절이 바뀔 때 물건 정리하는 것을 반복하다가 어느 때 쯤에는 계절이 바뀌어도 수납 위치를 바꿀 필요가 없을 만큼만의 물건을 지니고 싶다. 기능 때문에 물건을 쓰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도 기능도 마음에 꼭 드는 물건만을 남겨 쓸 때마다 기분이 좋은 물건들만을 낡을 때까지 쓰고 싶다.


  적당한 미니멀라이프를 살고 있는 지금, 하나 남긴 750ML짜리 보온병을 쓸 때마다 뽀얀 색감과 보들보들한 촉감, 자동차 컵꽂이에 딱 맞는 크기, 차가 흔들릴 때도 흘릴 일이 없게 설계된 입구에 매번 감탄한다. 하나 남긴 부츠의 예쁜 색감, 발의 편안함, 빗길을 걸어도 진흙탕이 된 산길을 걸어도 더러워지지 않는 기능에 매번 감탄한다. 두개 남긴 기모 맨투맨의 귀여운 디자인, 보드라운 기모의 촉감, 아무리 건조기에 돌려도 줄어들지 않는 짱짱함에 매번 감탄한다. 물건을 줄이고 줄여도 남긴,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은 쓸 때마다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물건들도 마음에 꼭 드는 물건만을 지니고 있는 생활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 것이다. 그러려면 조금쯤 더 부지런해야 할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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