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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르빠 Apr 30. 2024

호수의 백조 같은 사람들

아파트 바로 앞에 출‧퇴근 때마다 지나치는 작은 공원이 있다. 휴일의 창문 밖으로 내다보이는 공원에는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가족들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늦은 퇴근길의 컴컴한 벤치에서는 부둥켜안은 연인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도 언젠가는 한번 성큼성큼 지나치기만 했던 벤치에 앉아 공원의 평화로움을 맛보고 싶었다. 머그잔의 커피를 한 모금씩 천천히 목구멍으로 흘려보내며 호젓한 공원 풍경의 일부가 되어 보고 싶었다.


가을이 깊어 가던 어느 토요일 오전, 드디어 스마트폰에서 한참을 스코롤 해야 바닥이 닿는 긴 글 한편을 찾아 커피잔과 함께 공원으로 나섰다.  


공원은 한적했다.

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는 부드러운 바람,

움찔움찔 바닥을 끌며 밀려가는 낙엽,

잔잔하게 피어오르는 커피 향,

나뭇잎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내 방 창문...


아무런 대가 없이 내 삶의 한 토막에 다가와 준 이 모든 것들이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아..!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바닥과 등받이가 각목으로 만들어진 벤치는 더 이상의 얄팍한 감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세로로 날을 세운 각목이 칼같이 엉덩이와 등을 파고들었다. 감내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과 허무함에 몸무림 치며 채 식지 않은 커피잔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 후에도 여전히 동네 사람들은 평화로운 얼굴로 벤치에 앉아 있었고, 밤에는 연인들이 부둥켜안고 있었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칼날 벤치에서 저토록 무덤덤한 얼굴로 반나절을 견뎌내는 저들은 누구인가? 두꺼운 피하 지방이나 사랑의 힘 따위는 그 무덤덤한 표정을 설명해 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공원을 지나칠 때마다 수면 아래로 부산한 길질을 감추고 평화롭게 있는 백조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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