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안정을 지나면 데크 트랙이 끝나고 흙길이 이어진다. 구청의 공사예산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데크를 가로질러 다니는 산짐승을 배려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등산화 아래에서 버석대는 흙 소리가 듣기 좋다.
능안정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봉수대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온다. 조선 시대 안산에는 동봉수대와 서봉수대, 두 곳의 봉수대가 있었으나,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동봉수대뿐이다. 서봉수대는 대략적인 위치만 추정된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가 궁금하면 한국기원에 문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북방 변경이나 남쪽 땅끝에서 한양까지 봉수를 전달하는 데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한화 이글스 외야수가 내야수를 거쳐 홈으로 송구하는 시간보다 빠른 것 같다.
봉수대를 지나 길을 이어가다 보면 약수터를 만나게 되는데, 가장자리에 플라스틱 바가지가 줄지어 걸려 있다. 우물가에서 물 한 모금을 청하던 왕건에게 아낙네는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주었고, 왕건은 감사의 표시로 아낙네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나뭇잎 대신 서역 상인에게서 구한 시나몬 파우더를 뿌려 주었더라면 더 감동했겠지만, 오늘 안산 약수터에는 나뭇잎조차 뿌려 줄 아낙네가 없다.
약수터를 지나면 데크 트랙을 따라 메타세쿼이아 숲이 펼쳐진다. 시원하게 하늘로 곧게 뻗은 나무들이 북유럽의 숲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나무가 얼마나 높은지, 다람쥐도 중간에 한 번 쉬었다 올라가야 할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지나가던 행인에게 핸드폰을 건네고는 난간에 늘어서서 단체 사진을 찍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은 흔하지만, 아저씨들이 그러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교회 남선교회와 시골 학교 동창회가 아니고는 아저씨들만 모여 다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메타세쿼이아 숲길 중간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인 넓은 쉼터가 있다. 탁자에 같이 앉은 어느 가족의 젊은 아버지가 파란 색깔의 음료수 한 잔을 건넸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았다. 빈 마음으로 허허롭게 앉아 있는 나를, 대접하고 존중할 존재로 인식했다는 것이 고마웠다.
나는 오래전부터 '반드시 이루어지는 기도'를 알고 있다. 그것은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기도이다.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시기 전 드리셨던 기도이며, 실현되지 않을 리 없는 유일한 기도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그 또한 주님의 뜻이니 기쁜 마음으로 죽을 것이고, 더 살라 하신다면 더 살 것이다. 그것뿐이다. 그러던 내게, 젊은 아버지가 건넨 음료수는 파란 하늘 물을 마시고 더 걸으라는 주님의 뜻인 듯싶었다. 아버지 곁에 앉아 있던 꼬마가 뭔가를 눈치챈 듯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았다.
곁가지 샛길에 한눈팔지 않고 순환 코스를 따라 계속 걷다 보면 북카페 쉼터를 만나게 된다. 안산 자락길은 곳곳에 쉼터가 많아 쉼터마다 쉬다 보면, 쉬다가 지친다. 여러 곳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북카페 쉼터를 권하고 싶다. 북카페 쉼터까지 가는 길에는 황톳길이 조성되어 있어 맨발 걷기를 할 수도 있고, 북카페에서는 호젓하게 독서와 사색을 즐길 수 있다. 동절기나 혹한기에 황톳길 맨발 걷기 대회를 개최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