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에 자리한 안산(鞍山)은 말안장(saddle)을 닮은 지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안장이란 말만 들어도 수리경제학에 나오는 Bordered Hessian Matrix의 고유값(eigenvalue)과 안장점(saddle point)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자연 속의 말안장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쉼터가 되어 준다.
안산 자락길 입구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가장 편리한 경로는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 내려서 서대문 독립공원을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는 길이다. 인공지능에게 “트럼프의 운전기사는 APEC 회담이 열리는 경주에서 길도 모르는데... 내비를 찍고 다니느냐”라고 물었더니, “앞 차를 따라간다”라고 했다. 안산 자락길 입구까지의 구체적인 경로는, 백팩을 메고 버킷햇(bucket hat)을 쓴 아저씨를 찾아 따라가면 된다.
독립공원 옆길에서 정면으로 군부대 정문을 발견한다면, 올바른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저씨 곁을 빨리 떠나야 한다.‘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군부대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들더라도, 참아야 한다. 그 부대는 전생에 일제에 항거하다 전사한 독립군을 위로하기 위해 국방부가 마련한 곳이다.
부대 담장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숨을 헐떡이게 만든다. 그러나 예전에 북한산성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빈자리에 서로 앉겠다고 몸싸움을 벌이던 등산객들 같은 사람들만 아니라면, 그렇게 힘든 길은 아니다. 그 길이 힘들게 느껴진다면, 아무리 싼 등산복이라도 입을 자격이 없다.
언덕길 오른편에는 수능 만점자와 전국 수석을 여럿 배출한 한성과학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학교 교문만 봐도 그 위압감에 숨결이 조심스러워진다. 대한민국의 어느 학교 교가를 보아도 ‘산의 정기’를 받지 않은 곳이 없지만, 이곳이야말로 산의 정기를 제대로 받은 곳이다. 이곳에서 학업을 마치고 하산한 학생들이 지금 우리나라 각계에서 최고의 인재로 활약하고 있다.
언덕길을 조금 더 오르면 안산 자락길 데크 트랙에 들어서는 입구가 보인다. 입구에 올라서면, 폭이 한 뼘도 안 되는 벤치에 엉덩이 끝만 걸치고 앉아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방금 전까지 숨을 헐떡이던 자신이 괜스레 부끄러워진다.
안산 자락길은 산 중턱을 한 바퀴 도는 순환코스다. 시계방향으로 돌든, 반대 방향으로 돌든 그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공교롭게도 두 방향을 택하는 사람의 비율은 거의 반반이다. 오차항이 백색 잡음(white noise)인 랜덤 워크(random walk) 모형이 정확히 들어맞는 듯하다. 다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점은, 어느 방향으로 갈지 망설이는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는 순간,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오랜 소망이었던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만다.
“이리 가면 연대 나오고 봉원사 있고, 저리 가면 서대문구청이고…”
긴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아! 그래요?”하며, 귀중한 정보를 얻은 듯한 추임새와 함께, 감사함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친절함에 보답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긴다.
연세대학교 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진 데크 길을 걷다 보면, ‘능안정’이라는 정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 포은 정몽주, 기호학파의 수장 율곡 이이, 영남학파의 창시자 퇴계 이황,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의 이름을 떠올리며 누가 정자를 세웠는지 찾아보니, 서대문구청이었다. 성리학적 철학과 이념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던 ‘능안정’이라는 이름이 갑자기 한정식집 이름처럼 느껴졌다. 서대문구청에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성리학보다 한정식이 훨씬 더 피부에 와닿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