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은행잎은 어김없이 노란색으로 물든다.
책갈피를 꾸미던 소녀 시절을 잊지 않게 하려는 듯, 세월을 건너 노란빛을 다시 입는 걸까.
아니면 가을 단풍 무대에서 빠질 수 없는 색이 노란빛이라, 제 몫을 다하려는 것일까.
혹은 고약한 열매 냄새를 달래기 위해, 잎사귀만이라도 곱게 가꾸려는 걸까.
은행나무는 약 2억 7천만 년 전, 고생대의 끝자락에 이 땅에 등장했다. 포유류도, 새도, 사람도 없던 시절, 공룡이 지구를 거닐던 때부터 은행나무는 묵묵히 자리를 지켜 왔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열매의 형태도 원래는 공룡 같은 거대한 고대 동물의 몸을 빌려 멀리 퍼지도록 진화한 것이라 한다. 은행 열매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는 부티르산 때문인데, 이는 다람쥐 같은 포유류에게는 강력한 회피 신호가 되지만 공룡에게는 군침 도는 맛있는 냄새였을 것이다.
문제는 공룡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은행나무는 자신을 멀리 퍼트려줄 존재를 잃었고, 그래서 지금도 세계 곳곳에 널리 퍼지지 못한 채 몇몇 지역에서만 명맥을 이어 왔다. 우리 주변의 가로수로 흔하게 만나는 이 나무가 사실은 오랜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는 화석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가을의 노란빛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은행나무는 잃어버린 존재를 기다리는 긴 시간의 끝에서, 슬픔과 희망을 자신의 잎에 고이 새겨 둔 듯하다. 누군가 다시 찾아와 줄지도 모른다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은행잎을 바라보면, 노란색 넘어 아득한 시간과 외로움, 그리고 조용한 희망이 스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