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슈르빠 Apr 30. 2024

누군가 태어난 날 나는 죽을 뻔했다.

우즈베키스탄 파견이 결정되었을 때 이슬람 국가에서 음주를 하다 태형이나 추방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알려지지 않은 제약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안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에서 이것이 마지막 술잔이 아니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레드 와인을 세 잔이나 주문해 마셨다.      


우즈베키스탄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인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았다. 간단한 선물을 준비해 찾아간 잔치집에는 마당 한가운데 생일상이 차려져 있었다. 사진 한 장에 선뜻 들어오기 어려울 정도로 긴 탁자 위에 온갖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탁자 양편으로 40개쯤 되는 빈 의자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인지 긴 탁자의 앞부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벌써부터 보드카를 들이켜고 있는 손님 네 명을 제외하고는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빈 의자 숫자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몇 사람만의 오붓한 식사 자리로 알고 갔다가 생일파티의 엄청난 규모에 놀라기는 했지만 무언가 신비롭고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감과 이국에서의 기분 좋은 낯섦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도착한 손님들은 의자에 앉기 전에 한 사람씩 주인을 마주하고 서서 이슬람식 인사를 나누었다. 양손을 얼굴 높이쯤 들고 축하의 말을 건넨 후 짤막한 주문과 함께 얼굴을 씻어 내리는 듯한 동작으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나머지 사람들도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다가 인사가 끝나면 일제히 미리 따라 두었던 보드카를 들이켰다.      


누군가 태어난 그날 정말 나는 죽을 뻔했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비장하게 마주 보던 빈 의자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 채워질 때까지 축사와 술잔 비우는 의식이 반복됐다. 손님들이 줄을 이어 도착하는 바람에 먼저 마신 술이 목구멍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새 잔을 들이켜야 했다. 방문객이 뜸해지는 빈 시간은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채웠다. 찻잔 크기 술잔에 보드카를 가득 따라 한숨에 들이키던 그들은 나를 예외로 인정해 줄 생각이 없었다. 한국의 평택과 부천에서 오랫동안 근로자 생활을 했던 어느 손님은 ‘술잔을 꺾어 마시면 남자가 아니라’라고 미리 선언함으로써 불투명한 의사소통을 핑계 삼아 술잔을 건너뛰거나 찔끔찔끔 나누어 마시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다.    

   

그 후 나는 한 동안 소금에 절인 오이 피클처럼 흐느적거리며 살았다.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으리라는 결심이 풀어지는 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우즈베키스탄은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와인과 맥주, 보드카가 넘쳐나는 술꾼의 천국이다. 그러나 술 향기에 너무 취하다 보면 태형보다 더 아픈 고통을 겪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이발소에서 나의 본래 모습을 되찾기까지의 긴 여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