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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르빠 Apr 30. 2024

보드카 잔에 숟가락으로 얼음 떠 넣기

우즈베키스탄으로의 파견이 결정되었을 때 추운 나라에서 고생이 심하겠다는 것이 나를 떠나보내는 가족과 친구들의 한결같은 걱정이었다. 타슈켄트로 부임하는 시기가 3월 중순이었음에도 짐 보따리에 겨울외투를 두벌이나 욱여넣었다.    


7월이 된 지금 길거리가 온통 사우나다. 동네 마가진(магазин, 구멍가게) 판매대에 내놓은 계란이 반숙이 될 것 같다. 기상당국의 공식발표는 섭씨 45도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7∼8월의 실제 기온은 섭씨 50도를 넘나 든다. 며칠 전에는 교민 한 분이 어느 건물의 전광판 온도계가 섭씨 70도를 가리키는 사진을 보내 주었다.  


본래 땀이 많은 체질이다 보니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등줄기로 줄줄 흘러내린다. 에어컨 바람에 땀을 말리고 나면 피부 표면에 바삭바삭한 피막이 형성된다. 언젠가 TV에서 어란(Fish Eggs)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땀을 흘리고 말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온몸이 참기름을 발라 말리기를 반복하는 어란 같이 느껴진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신기할 정도로 더위에 무덤덤하다. 양산 쓴 사람,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사람, 부채질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무리 더워도 찬 음료는 마시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판매하지 않는 카페도 많다. 그러다 보니 한국 식당이 아닌 현지인 식당에서는 보드카를 온 더락(on the rock)으로 마시기도 쉽지 않다. 기본적인 영어도 통하지 않는 식당 종업원에게 온 더락 제조에 필요한 재료와 장비를 주문하는 데는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다. 보드카를 마시는 데 왜 얼음이 필요한지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종업원과 10분 이상 씨름해야 한다. 번듯한 레스토랑에서조차 글라스나 얼음덩어리(ice-cube), 얼음집게(ice-tongs)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물건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창의적인 손짓과 발짓이 필요하다. 설명에 성공하더라도 원하던 것을 모두 얻는다는 보장은 없다. 대부분의 경우 결국에는 와인 잔에 숟가락으로 얼음을 떠 넣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목표 달성을 포기하는 데서 오는 평안함과 어이없는 상황이 가져다주는 재미를 맛볼 수 있게 된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 사람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에 집착하지 않으면 지루하고 답답한 의사소통 과정이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사회적 합의 도출이나 공감대 형성 과정을 거래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지루한 과정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가끔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그 다름에 충분한 합리적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나면 도출된 컨센서스(made consensus)보다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가져다줄 때도 있다.


가족들의 걱정은 추위에서 더위로 바뀐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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