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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르빠 Apr 30. 2024

내 멋대로 번역기

(이 글은 요즘처럼 AI 번역기가 널리 쓰이기 전에 작성된 글입니다)


한국인들이 우즈벡 식당에서 빠트리지 말아야 할 말 중의 하나는 ‘덜 짜게 해 주세요’이다. 이 말을 생략하면 혀가 쪼그라들 정도로 짠 샤슬릭(Шашлык)과 스테이크를 앞에 놓고 미간을 찌푸리거나, 사해에 몸이 뜨듯이 고기 덩어리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소금국물을 맛보게 된다.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주문받는 종업원에게 ‘노 솔트’(easy on the salt)를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특히나 종업원이 별다른 이견을 달지 않고 히죽 웃으며 돌아선다면 그것은 주문 내용을 못 알아들었다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알면 된다. 그럴 때는 반드시 종업원에게 번역기를 돌려 보여줌으로써 주문 내용을 확인시켜주어야 한다. 세상에는 샤슬릭이나 스테이크를 짜지 않게 먹는 인류의 한 분파와 종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종업원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면 주문이 성공한 것으로 알면 된다.


구글번역은 한국어와 영어밖에 모르는 나와 러시아어 또는 우즈벡어 밖에  모르는 종업원 사이의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적당한 소금양을 손짓, 발짓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하는 일 중의 많은 부분은 상급부서의 지시에 따라 컨셉 페이퍼(concept paper)를 작성하거나 관련 법령, 대통령령, 내각령 등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내게도 그들이 작성한 컨셉 페이퍼를 검토할 일이 가끔 생긴다.  


문서가 대부분 러시아어로 작성(요즘은 정부 방침에 따라 우즈벡어로 작성한다고 합니다)되다 보니 내용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선 번역이 필요하다.

구글번역으로 러시아어 문장을 한글로 바꾸면 아무 말 대잔치가 벌어진다. ‘어긔야 즌대를 드뎌욜셰라’, 작자미상의 백제가요보다 더 어려운 횡설수설이 튀어나온다. 극도의 무책임한 결과를 내던지고는 멀뚱멀뚱 커서만 껌벅이는 번역기를 보고 있으면 지폐만 빨아들이고 음료수 캔은 떨어뜨리지 않는 자판기가 생각난다.


현격한 분량 차이도 번역결과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킨다. 러시아어 한쪽 분량의 문서는 한국어로는 거의 2/3 쪽으로 줄어든다. 현지직원 말에 의하면 문장의 뼈대를 이루는 단어는 단 한 단어라도 생략이 허용되지 않는 러시아어와 달리 한국어에서는 많은 단어가 생략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번역하기 어려운 건 아예 빼먹지나 않았는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럴 땐 한글 대신 영어로 번역해 읽는다. 한결 정확하게 번역되는 것 같지만 결국 중요한 부분에 가서는 현지직원을 통해 문서 작성자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식당과 사무실에서의 구글번역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식당에서의 구글번역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해 주지만 사무실에서는 머리만 아프게 한다.


그러고 보면, 구글번역이 가진 능력의 한계치는 식당과 사무실 중간 어디쯤인 것 같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구글번역만으로 충분한 삶이라면 그것은 축복받은 삶일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구글번역에서 자신의 일상생활이나 하는 일의 내용을 번역해 보면 된다. 간결하고 정확하게 번역되면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 괴랄한 횡설수설이 나온다면 자신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경망 기반의 기계번역 같은 복잡한 번역기술이 필요해진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점점 불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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