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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르빠 Apr 30. 2024

일등병

by 슈르빠

홍천의 겨울은 유난히 춥다. 

오랜 짬밥에 지방질이 빠져나간 육군 일등병은 늦가을부터 춥다. 


나름 이름 있는 인서울 대학을 나왔으나 말단 보병소대에 배치된 것부터가 불만이다. 

어깨를 깊숙이 파고드는 기관총의 무게는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훈련소에서 사단 행정병으로 빠질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쉽다. 

빰빠라와 빳따보다 그것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고참의 훈계가 더 구역질 난다.

작업모에 깊숙이 담겨 있는 인사계의 얼굴은 갈색곰을 생각나게 한다.


사회에 대해서도 불만이다. 

육군 일등병이 낙엽더미에 몸을 묻고 사시나무 떨듯 떨며 밤을 새우는 동안 

사제 인간들은 과일안주를 곁들인 생맥주와 몸부림치는 꺾기춤으로 밤을 새운다. 

미성숙 사회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한다. 


일등병은 확신한다. 

국방을 책임진 육군 일등병의 희생으로 사회가 유지된다. 

그런 만큼 일등병은 사회에 무엇이든 요구할 자격이 있다.  




어느 늦가을 중대전투 야외훈련이 시작되었다. 

인근에 유명한 사찰이 있는 시골마을 뒷산이다. 


야외 훈련 중의 짬밥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깊숙한 반합에서 숟가락으로 찍어 올리는 떡밥,  

고춧가루와 배추가 의무적으로만 모여 있는 김치 


일등병은 기꺼이 부식 추진에 나선다. 

빈 반합을 떨겅거리며 민가로 내려간다.


와지선 근처의 외딴 초가집을 선택한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한참만에 컴컴한 방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마침 할머니 한 분과 초등학교 1학년쯤 돼 보이는 꼬마가 저녁을 먹고 있다. 

저녁 시간을 정확히 맞춘 것도 일등병의 오랜 경험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올려다보는 꼬마의 까만 눈망울이 잠시 마음에 꺼렸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할머니, 반찬 좀 줘요!.” 

부탁이라기보다는 당연한 요구다.


그러나 밥상에는 밥과 국, 그리고 김치 한 사발이 전부다. 

문득 집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을 애써 억누르며, 

“뭐 좀 다른 거 없어요?” 


할머니의 당황한 표정과 함께 한참이나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침묵의 뜻을 알아챈 일등병은 짜증을 낸다.


“나 참 이거 미치겠네.”


그때 꼬마가 밥상에서 조용히 물러나 앉더니

윗목으로 엉금엉금 기어간다.  


그리고는 윗목에 놓인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끄르더니 

신문지에 싼 무언가를 조심스레 꺼내놓는다. 


굵지 않은 삶은 밤 몇 알이다. 

“내일 우리 학교 운동회라서 할머니가 삶아 주신 건데요” 


“.......”

“.......”


순간 일등병은 머리가 멍해진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할머니와 꼬마의 의아해하는 눈길을 뒤로한 채 대문 밖을 뛰쳐나온다. 


논둑길을 따라 한참을 달린다. 

숨이 차 멈추어 선 그곳에는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이 다가와 있다. 

겨울 언저리의 늦가을 바람이 허허롭게 불어온다. 


그랬었구나. 

나도 그랬었구나. 

맞아 나도 그랬었구나.


아득한 기억 저편 

무겁게 내려앉는 한여름의 더위 속에 

할머니와 단둘이서만 먹던 점심 


소나무 옹이가 송송 빠진 마루에서 

물에 말은 보리밥과 된장에 찍어 먹는 고추 몇 알 

늘 그랬었기에 그냥 그런 줄 알았던 점심 


올려다보던 꼬마의 얼굴에 자꾸만 자신의 모습이 겹쳐진다. 


거친 김치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워도 

내일 있을 운동회에 싸구려 사탕 한 봉지 없어도 

정성스레 준비한 자신의 보물을 거리낌 없이 내주던 꼬마의 모습에 

그냥 울어버리고 싶다. 


가난이 아무리 포악해도 아무런 해를 입히지 못하는 사람들, 

세월의 흐름과 상관없이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일등병이 어려서 잃어버렸던 그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일등병은 생각한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진정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로 구분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일등병은 꼬마의 맑고 까만 눈을 오랫동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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