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그날의 기억을 잊었다.
거의 10년 전 이야기를 꺼내오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입사 후 3개월간의 신입훈련은 나에게 충격 그 자체로 박제된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군대이야기를 생생하게 정말 엊그제 이야기처럼 하는 거랑 얼추 비슷하다고 보면 될까.
다나까, 수직적이고 보수적인 교육환경, 어찌 보면 특성까지 고려하면 더 괜찮은 비유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제2의 세상이었으니깐.
그때 강의실 공기까지 이상하게 생생하다.
그 시절을 떠올리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3개월 교육 내내 승무원의 업무 우선순위, 1위는 비상 및 비상탈출 상황 대비 업무라는 것을 끊임없이 배운다.
사실 이것은 정말로 승무원 교범에 그렇게 명시가 되어있다.
손님들은 마냥 상냥히 웃고 있는 승무원을 보면서 그런 사명감은 쉽게 보지 못하겠지만 우리 가슴 안에는 사실은 그 명분이 가득하다.
철저히 안전요원이라고 3개월을 교육받으니 말이다. 과거에 비해 사건사고가 많은 요즘 같은 날은 더 와닿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비상상황들 환자승객, 흡연승객 그리고 난동승객에 대해 상황판단을 빠르게 해야 하고 비행기라는 제한적 공간에서 초기진압은 늘 중요하다.
그렇게 우리는 신입교육 내내 승무원은 안전을 위해서 탑승하게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늘 가슴에 새기듯 교육을 받고 그대로 비행에 올라왔다.
그러다 보니 서비스보다 안전이 우선이었다. 그러다 신입 때 너무 안전에 대해 승객에게 강요하다가 혼난 적이 있었다.
손님의 작은 가방도 전부 선반에 올리라고 했고 심지어 목베개, 작은 파우치까지도 그 시절 나에겐 위험물이었다. 혹시라도 비상탈출 하게 되면 손님이 발에 걸려 넘어지진 않을까 했다. 그래서 승객에게 안전이라는 명분으로 다 없애버렸다. 손님은 이것까지 올려야 하냐는 표정을 지었고 난 당당하게 안전을 위해서라며 안내했던 그 시절이 있다. 그러다 씨게 혼났다.
사실 안전에 꽃은 이륙직전에 하는 '기내안전시연'이다. 비행기를 타면 비상상황에 대한 탈출구, 구명복 입는 법, 산소마스크 착용법 등을 설명해 주는 안전시연을 승무원이 하게 되어있다.
우리 항공사는 스크린이 없기 때문에 승무원이 직접 손님 앞에서 보여줘야 했다. 작은 비행기는 1열과 비행기 가운데 비상구 15열에서 두 명이 시연을 해야 했었다.
그 작은 비행기에서 매번 1열에 서서 안전시연을 해야 만 했었던 또 다른 나, 똑같은 머리에 똑같은 유니폼입은 나의 동기의 이야기이다.
우리 항공사는 비행기 전방에는 사무장과 막내가 근무한다. 그날은 내 동기가 1열 비행기 전방에서 기내안전시연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비행기 전방에는 도어를 닫고 사무장님이 지상직원에게 받은 서류들을 검토하고 승객 특이사항에 대해 확인하며 왔다 갔다 서류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안전시연은 웃으면서 하면 안 되고 안전에 관해서는 단호하게 해야 하는 거라 배웠다. 정말이다. 그래서 안전시연을 할 때 세상 근엄 진지한 눈빛과 꽤나 비장한 표정으로 시연을 했었다. 눈썹을 치켜뜨고 카리스마 있게 응시하고 세게 손을 뻗고 탈출로를 지시했었다. 마치 정말 당장이라도 비상탈출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뭐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색하다 못해 괴기할 정도다.
안전에 관한 집착이었을까, 안전에 대한 그저 순수한 열정이었을까.
집착과 열정 그 사이에 애매하게 왜곡된 과도함이 이런 대 참사를 불러올 줄 그 누구도 몰랐다. 3개월을 가르친 교관들 조차 몰랐을 거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비행기는 이륙준비를 위해 활주로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기내에서는 손님의 좌석벨트, 등받이, 창문덮개를 체크하며 안전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리고 안전시연을 위해 1열과 15열에 서서 안전시연방송을 기다렸다. 이내 곧 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 비행기의 비상구는 모두 6개로 앞쪽에 2개씩 있으며 양쪽에 각각 있습니다."
라는 안내 방송에 우리는 몸을 뒤로 돌려 맨 앞쪽 도어 2개를 가리켜야 했다.
그때 전방에는 사무장이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안전 시연에 너무 집중했던 내 동기는 방송의 멘트를 듣자마자
재빠르게 칼각도로 몸을 틀었고, 바로 맨 앞쪽 도어를 향해 비장한 표정으로 손날을 세게 뒤쪽으로 피며 앞쪽 도어를 가리켰는데 그러다
뒤에서 서류정리하던 사무장의 정수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정갈하게 띄워 올린 사무장의 가르마를 두쪽 내버렸다.
그 장면을 보고 앞에 있는 손님들이 전부 박장대소를 했다.
안전시연의 카리스마에 자아를 잡아먹힌 내 동기는 그렇게 손님들이 다 보는 곳 앞에서
정갈하게 빗어 봉긋하게 띄워 올린 사무장의 가르마를 후두려쳐버렸다.
얼마나 본인은 놀랐을까. 얼굴이 씨뻘개졌다고 전해 들었다.
내 동기는 그 이후에 그날의 비행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한다. 지금 물어봐도 기억을 못한다.
"그때 사무장 누구였어? 그러고 나서 비행은 어떻게 했어?"
"야 나 정말 기억이 전혀 안 나, 사무장도 기억이 안나 "
스스로 지운 기억일까..
정말 그 시절 이야기다. 입사동기는 동기라는 단어 이상의 존재다. 대체단어가 새롭게 필요하다.
같은 색 비행기에, 내가 탔던 비행기, 내가 탈 비행기, 내가 갈 노선, 내가 갔던 노선, 과거의 나 같기도 미래의 나 같기도 하다.
또 노선마다 기종마다 어떻게 일할지 동선까지 눈에 선하다. 같은 머리를 하고 같은 유니폼 입고 이제는 웃는 법도 닮아버린, 공항을 걸어 다니는 또 다른 나의 이야기였다.
지금도 안전과 서비스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며 비행을 한다. 어느덧 나도 10년 차가 되어간다.
승무원은 승객 여러분을 위한 안전요원이다. 그 시절의 나도, 지금의 나도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고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승무원입니다.
PS. 제법 날씨가 선선해졌습니다. 오늘도 글 읽으러 놀러 와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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