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off
#1 설봉(雪峰)과 복하(福河)
기억이 나를 만들다
사람의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는다.
고향의 산과 강, 부모의 손길,
어린 날의 눈물과 웃음이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어 오늘의 나를 만든다.
첫 계절은 내가 처음 세상을 바라보던 시절의 풍경과 가슴 깊이 남아 있는 기억들이 담겨 있다.
지나온 시간은 멀어졌지만,
그 시절의 온기는 여전히 내 삶을 따뜻하게 지키고 있다.
내 고향은 서쪽에 설봉이 서 있고, 동쪽으로는 복하가 흐르는 마을이었다.
산과 강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을을 품었다.
나는 그 한가운데서 자랐다.
설봉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든든한 형 같았고,
복하는 날마다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다정한 친구 같았다.
초등학교 교가에 ‘동편으로 복하내를 바라보면서’라는 구절이 있을 만큼,
고향의 산하(山河)는 소년의 삶 깊숙이 스며 있었다.
문득 힘이 빠질 때면 나는 마음속 설봉에 오른다.
그곳에서 복하를 내려다본다.
그 자리에 여전히 열여섯의 내가 서 있다.
산과 강은 변함없이 나를 맞아준다.
고향을 떠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내 안의 설봉과 복하는 여전히 나란히 서서 나를 지탱하고 있다.
설봉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어릴 적 나에게는 그 사실이 너무 당연해서,
산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봄이면 친구들과 진달래 꽃잎을 따 입에 넣으며 봄의 맛을 보았다.
'설봉산에는 무서운 병에 걸린 사람이 숨어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에 겁을 먹고,
누가 쫓아오는 듯 정신없이 산에서 내려오던 두려움마저도 지금 생각하면 산이 준 놀이였다.
여름이면 발목을 감싸던 차가운 계곡물에 더위를 씻었고,
가을이면 삼형제 바위 아래서 소풍의 추억을 쌓았다.
겨울의 기억은 유독 시리고도 따스하다.
학교 조개탄 난로에 불을 붙이겠다며 친구들과 솔방울을 주우러 산에 오르던 날들.
주머니가 가득 찰 때까지 솔방울을 모으고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내려오던 길에 나눈 웃음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설봉이 내게 가르쳐 주고 있던 것이 '머무는 법'이었다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모진 비바람 앞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며 계절을 견디는 모습을.
훗날 인생이 흔들리고 세상의 속도가 나를 압박할 때마다 내가 다시 찾게 되는 단단한 중심은,
이미 그때 설봉 아래에서 몸으로 배운 것이었다.
설봉이 머무는 법을 가르쳤다면,
복하는 나에게 세상을 만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냇가로 모였다.
집에서 몰래 들고나온 솥단지와 고추장, 국수 다발을 챙겨 든 우리에게
복하천의 '천엽(川獵)'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선 한여름의 거대한 축제였다.
미꾸라지와 붕어를 잡아 채 여물지도 않은 파 뿌리를 툭툭 끊어 넣고 끓여낸 매운탕.
훅 끼쳐오던 비릿한 물비린내와 칼칼한 고추장 향은 흙과 물, 생명의 냄새가 어우러진
우리들만의 만찬이었다.
하지만 축제의 흥이 늘 점잖게만 흐르지는 않았다.
한바탕 물놀이를 마치고 젖은 옷을 햇볕에 달궈진 바위 위에 펴놓은 채, 알몸으로 옷을 말리던 오후였다.
정적을 깨고 둑길 위로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하필이면 부발 동네 학교 여학생들이 무리 지어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황한 나는 가릴 곳도 찾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었고,
여학생들은 손가락질하며 한참을 놀려대고서야 지나갔다. 달아오른 건 바위뿐만이 아니었다.
부끄러움에 빨갛게 익어버린 내 얼굴은 그날 저녁 노을보다 더 짙은 빛을 냈다.
민망함을 달래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저 멀리 설봉산 위로 하얀 뭉게구름이 양 떼처럼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구름은 고향 집 마당의 포도송이로 변해갔다.
'저 양의 등에 올라타 하늘을 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에 젖은 바짓단도, 비린내가 밴 손도 개의치 않았다.
불을 지피고 고추장을 풀어 넣는 기다림의 시간 동안 우리는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
복하는 그렇게 나에게 노동의 신성함과 기다림의 미학을 동시에 가르쳐 주었다.
발목을 간지럽히며 스쳐가는 복하의 물살은 마치 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듯했다.
'여기 머물지 말고, 나를 따라 더 넓은 세상으로 흘러가렴.'
그 흐름을 따라 나의 꿈도 조금씩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물결 위에 실어 보낸 소년의 꿈은 어느덧 바다에 닿았고, 나는 다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38년 항공인으로 하늘의 세계에서의 치열한 삶을 관통하며 내가 붙들었던 것은 결국 고향의 강물이 가르쳐준 지혜였다.
장마에도 쉽게 넘치지 않고 가뭄에도 쉽게 마르지 않는 그 유유자적한 흐름.
그 리듬은 내 삶의 영원한 나침반이 되었다.
복하의 물소리를 떠올리면 지금도 발목을 스치던 시원한 물살이 느껴진다.
그 축복의 강물은 지금도 내 안에서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