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을 두고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는데,
며칠 사이에 보고 겪은 몇 가지 일화들이 성선과 성악의 수위를 넘나들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위험한 아침 출근길 2차선 도로의 중앙선을 타고 걷는 사람
만원인 버스 정류장에서 타인의 배려 없이 담배 연기 품어 내는 사람
차량의 출입구를 막아 이틀씩이나 주차 통행을 방해하고 차를 방치한 사람
정반대로, 정이 넘치는 사람도 있다.
오랜만에 찾은 손자에게 주름진 손으로 꼬깃한 지폐 한장을 전해주던 할머니
말없이 건네준 친구의 농사지은 고구마 한 자루, 그리고 단감 한 박스
비틀거리며 건널목을 건너는 노인을 보고, 부축하며 길을 건네준 뒤 말없이 가버린 사람
사람은 과연 착한 것이 본능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악한 것인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심판에 나오는 천사와 악마의 모습이 같은 사람이라면, 원래부터 가슴에 담고 있는 얼굴은 무엇인가?
나는 자아의 성찰을 먼저 묻는다.
내가 과연 올곧은 삶을 살아왔는가?
혹은 그러한 삶을 보이며 솔선하였는가?
국민학교 시절 학년이 끝나면, 성적표에 생활 습관을 ”가나다“로, 학습 정도는 ”수우미양가“로 평가하여 기록으로 남겨졌다.
학교성적이 좋아 성적이 ”수“가 많으면 희한하게도 생활태도를 평가하는 생활발달 상황도 ”가“ 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그것도 빨간색으로 원을 찍은 ㉮라는 글씨
”성적이 좋으니 인성도 좋다!“라는 의미였을까
어릴적 부친께서는 늘 우리 형제들에게, 마당의 청소와 집안의 신발 정리를 요구하셨다.
그래서 우리집 마당에는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였고, 신발은 늘 짝을 맞춰 나란히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느때 누가 보더라도 그것이 보여지는 마음이고 가풍이다“하던 마음을 이어받아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현관의 신발을 가지런하게 정리한다.
중학교도 입학시험이라는 평가시대를 살아온 내가, 학습능력을 ‘수우미양가’로 생활태도 까지를 ‘가나다’로 평가하는 방식을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바른 인성과 사람 살아가는 도리는 알아가야 하지는 않을까!
작은 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없다.
수채화같은 동화책 한권을 읽은 느낌의 감동을 간직하고 출발하던 아침에, 감흥이 깨지는 눈살 찌푸려지는 행동을 보며, 다시금 성찰하는 마음과 유감스러움을 함께 표하다.
전날 눈이 내려 도로에 쌓여 살짝 빙판을 만들다.
어릴적 내가 다닌 산비탈을 깎아 만든, 국민학교의 교문 앞 언덕은 눈만 오면, 빙판으로 반짝거렸다.
교문 정면의 양편으로는 사람들이 편히 다닐 수 있게 보도블럭을 깔아 놓았고
중앙은 널따랗게 차들이 다닐 수 있게 구분이 되어 있었으나, 당시에 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한복판은 늘 학생들의 썰매장이나 다름없었다.
함박눈이 내려 고개를 웅크리고 교문을 향해 오르면, 어느 사이 먼저 등교한 학생들이 책보를 교실에 던져 놓고 쌩하고, 미끄럼을 타고 지나간다.
번들거리는 도로가 금새 눈썰매장이 되고 여기저기 미끄럼길에 ”아이쿠“하는
비명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고는 한다.
길을 지나던 어른들이 소리 내어 ”얘들아 다칠라 조심해라!“
하는 외침이 귀에 들릴리 만무하다.
보다 못한 학교 앞 첫 번째 문방구점 아저씨가 나섰다.
필요한 문방구외에 설탕을 녹여 소다를 넣어 만든 달고나로 코흘리개 꼬마들을
유혹하던 문방구점 아저씨가 이런 날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 쌓아놓은 연탄재 더미에서 연탄재를 가져다 언덕에 뿌린 다음에야 썰매장은 진정이 되어갔고, 때마침 울린 학교의 수업 시작 종소리에 학생들이
썰물 빠지듯 물러난 뒤,
어느사이 눈 그친 학교 앞 언덕길엔 찬바람에 얼어붙은 흔적만 남겼다네
그때는 타고 남은 연탄재도 귀하여, 참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는 하였는데!
시간이 시나브로 메말라가는 나의 감성만큼이나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