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이야기하다(I)

by 별빛단상

문득 스치는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겨울의 한복판에 들어있음을 실감하다.

동장군의 혹한 추위로 몸을 사리면서, 반사적으로 더 추웠던 시간을 떠올리거나

따뜻한 나라의 여름을 기억해 내는 것으로 위안을 갖는다.

칼바람이 대야에 받아놓은 물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차가운 손으로 방문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쩍

달라붙던 추위도 도회에서는 실감이 어렵다.

하지만, 아무리 추운 겨울날도 다 지나갈 것이니, 겨울이 깊은 만큼 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아니던가?


겨울에는 눈이 와야 제격이지 겨울비는 농부를 한숨짓게 한다.

자연은 스스로를 회복하는 자정 능력이 있다. 눈 덮인 겨울 보리밭 속에서는 보리의 새싹이 봄을 위해 준비가 한창인 것을, 겨울비가 오면 다가오는 계절을 망치기 십상이다.

추위는 풀벌레 개체를 조정하며 눈이 오면 식물에게는, 보온의 기능이 있어 겨울을 녹이며

준비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노안이 오면서부터 신문을 읽기 어려워져, 조간신문을 끊고 인터넷 신문으로 대체 한 것이 오래전의 일이고, 잇따른 시각적 불편함으로 오롯이 책을 한 권 다 읽은 것도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것 같다.

뽀얀 먼지 속에 쌓여 있는 몇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한번 책을 들면 몇날 며칠이 되어도, 마지막 페이지의 끝을 볼 때까지 책속에 묻혀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내가

이제는 일년이 가도 책한권을 오롯이 독파하기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노안을 핑계 삼은 것도 있지만 결국은 나태하여진 탓이다.


목민심서를 꺼내놓았다가 다시 역사소설 “정도전”, 그리고 최인호 선생의 “상도”를 꺼냈다가 다시 내려놓고 처음 꺼내든 다산선생의 “목심심서”를 선택하여 펼쳐 들었다.

신기하게도 꺼내 드는 책마다 책갈피가 꽂혀 있다.

그것도 생김과 문양이 다른 책갈피가, 꺼내 드는 책마다 숨어 있다 삐죽이 튀어나오는 모습이, 어느 때

어느 순간에 이책을, 다시 상면하게 되리라 예측하여 미리 숨겨 놓은 것이 아닐진 데, 마치 숨겨둔 보물을

발견이라도 하듯 반갑다.


어느 날 인가 오래간만에 본가를 찾은 나에게 부친께서 나에게 종이쪽지 한 장을 내미셨다.

종이를 쉽게 구할 수 없었던 시절, 딱딱한 책표지 같은 종이에는 중국의 송나라 유학자 주자(朱子)의

주자십훈(朱子十訓)을 한문 밑에 음(音)과 훈(訓)을 붙인 글을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글이었다.

글을 받아 든 젊은 시절의 나는, 뜻과 훈을 새기는 것보다 그 시절, 성실하지 못한 태타한 근성과 부족한 열성을 책망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였던 듯하다.

훗날, 그것은 내가 주자를 떠올릴 때마다 송곳으로 찌르는 회한으로 오랫동안

존재하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웬만하면 나의 사고를 강요하지 않는 습관이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사색하는 시간이 길어진 긴 계절에

무심히 흐르는 나의 시간 속 주자의 십훈을 다시 한번 새기다.


주자십훈(朱子十訓)

不孝父母死後悔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죽은 뒤에 뉘우친다.

不親家族疏後悔

가족에게 친절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뉘우친다.

少不勤學老後悔

젊을 때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뉘우친다.

安不思難敗後悔

편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한 뒤에 뉘우친다.

富不儉用貧後悔

부할 때 아껴쓰지 않으면 가난한 후에 뉘우친다.

春不耕種秋後悔

봄에 종자를 갈지 않으면 가을에 뉘우친다.

不治垣墻盜後悔

담장을 고치지 않으면 도둑맞은 후에 뉘우친다.

色不謹愼病後悔

색을 삼가지 않으면 병든 후에 뉘우친다.

醉中妄言醒後悔

술취할 때 망언된 말은 술 깬 뒤에 뉘우친다.

不接賓客去後悔

손님을 접대하지 않으면 간 뒤에 뉘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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